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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미술의 7가지 키워드와 함께 떠나는 방창현의 세계도자기행(12)
  • 편집부
  • 등록 2011-05-13 10:35:07
  • 수정 2011-05-13 13:3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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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몽환夢幻과 서정抒情
  • 열두 번째 작가 : 캐띠 코에즈Cathy Coez

이 글은 현대미술의 중요한 키워드인 숭고the sublime, 몸body, 미니멀리즘minimalism, 물성materiality, 서사narrative, 개념미술conceptual art, 팝아트pop art를 중심으로 본 현대도예 비평의 글이다. 하지만 형식면에서는 기행문적 수필의 형식을 빌어 독자들이 현대 도예 담론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쓰여졌다. 한국의 현대도예가 오랜 동면의 시기를 지나 이제 찬란했던 옛 영화를 위한 용트림을 하는 이 시기에 한국 현대도예의 미래 비젼과 현재의 성찰을 제시하는 글이 될 것이다.

 

몽환夢幻과 서정抒情  
열두 번째 작가 : 캐띠 코에즈Cathy Coez

 

살아갈수록 모호한 것들과 명석한 것들, 몽롱한 것들과 확실한 것들, 희뿌연 것들과 뚜렷한 것들은 뒤섞인다.
김훈, 빗살무늬토기의 추억

 

공항에 내리자마자 안개가 자욱하다. 안개의 하얀 속살이 내 입술을 훔치기 전까지 나는 안개가 맛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불혹지년不惑之年에 이르러서야 안개의 맛을 처음 느낀 것이다. 그 맛은 언어로 정의할 수 없다는 것을, 그리고 남들에게 이 특별한 경험을 떠들어대는 일이 무척 남세스러움을 처음부터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대로 묻어두기로 했다. 버스는 안개가 만들어낸 이국의 풍경 속으로 미끄러지듯 빨려 들어간다. 그리고 아주 잠깐 동안 서울의 풍경이 내 의식의 수면 위로 떠오르다 사라지는 걸 느꼈다. 잠시도 정주定住할 수 없었던 그 곳이 내 안으로 다시 들어 온 것은 무엇 때문일까?

벨기에Belgium의 미명未明이 모든 상념을 걷어낼 무렵 세상은 온통 ‘서정抒情’으로 바뀌었다. 바로 부르셀Brussel에 있는 펄스Puls Gallery 갤러리를 들어서는 순간이었다. 프랑스 출신의 도예가 캐띠 코에즈Cathy Coez의 ‘클레이 드로잉Clay Drawing’은 생의 다난多難한 서사적 양식을 지양하고 서정적인 미니멀리즘의 경이로움을 보여준다.
갤러리 안은 온통 기하학무늬의 원들이 만들어 내는 선율로 가득하다. 원반의 모양 위에 다시 다른 색을 지닌 원의 형태가 올라가고, 그 위에 다시 기하학 문양들이 채워진다. 수백 개의 작은 기하학적인 원소들이 만들어 내는 이 풍경은 다름 아닌 우리가 몸담고 있는 우주의 신비를 보여준다. 극도로 절제되고 추상화된 이 기하학적 구성의 형태들은 하나의 소우주microcosm에서 대우주로macrocosm 확장되고, 이 거시적인 양태들의 현전성은 삶의 소소한 서사성을 침묵시킨다. 결국 내가 살면서 집착하고 있었던 것들에 대한 부질없음과 욕망의 초라함들에 대한 집요한 언어적 정의들이 이 대우주의 현전 앞에서 헐거워지더니, 급기야 그 절박함 마저 몽롱한 반수면의 상태로 되돌린다. 마치 공항에서 마주친 안개 속을 지나듯이 나는 갤러리를 부유한다. 이것이 예술일까? 현실과 환상, 현재와 시원始原을 교차시킴으로써 현상계 너머 존재의 저편을 손짓하는 이 몽환夢幻의 시각언어들이.  
다양한 매체를 이용했던 캐띠 코에즈Cathy Coez는 2007년부터 흙을 작품의 주재료로 처음 사용하게 되었다. 캐띠 코에즈는 물레 위에서 만들어지는 일률적이면서도 다양한 형태를 지닌 흙이야말로 자신이 추구하는 기하하적인 원반모양을 만들기 위한 가장 적절하고 매력적인 재료임을 발견한 것이다. 작가는 컴퓨터의 벡터 드로잉 프로그램Vector Drawing Program을 이용해서 작품을 디자인하고, 갤러리에 설치될 작품들의 구성과 구도를 정밀하게 계획을 한다. 그리고 수백 개의 다양한 원반들을 물레를 이용해서 만들어 낸 후, 고온으로 초벌을 하고 유약을 입혀 작품을 완성한다. 작가는 물레를 차는 행위와 그 과정에서 만들어지는 즉흥적인 흙의 원반 형태를 드로잉의 개념으로 인식한다. 자신이 명명한 ‘클레이 드로잉Clay Drawing’과 ‘자기 드로잉Porcelain Drawing’은 작가 자신의 손가락 사이에서 만들어지는 예측할 수 없는 즉흥성과 자연스러움을 동반하며, 자신이 계획하고 통제할 수 있는 이성의 제한 범위를 넘어선 또 다른 미지의 영역임을 잘 인식하고 있다. 이 드로잉을 통해서 만들어진 개별적인 기하학적인 원반(소우주)들은 갤러리 벽면 전체에 드리워질 또 다른 기념비적인 드로잉(대우주)을 위한 작은 유니트unit가 된다.
캐띠 코에즈Cathy Coez의 작품은 크게 ‘드로잉’과 ‘조각’으로 구분된다. 작가는 흙을 재료로 사용하기 전에 실크 스크린silk-screen을 이용한 평면 드로잉작업을 주로 했었다. 초기의 드로잉은 레디메이드ready-made 포스터나 사진 위에 그려지는 다채로운 색조 드로잉을 통한 장식적인 효과를 추구했지만, 흙을 이용한 ‘Clay Drawing’과 ‘Porcelain Drawing’ 시리즈에서는 미니멀적이고, 순수한 단색조의 톤을 추구했다.  
캐띠 코에즈Cathy Coez의 ‘Drawing Series’에서 작품의 제목(「#05 Violet 17」, 「#02 Yellow fluoro 242」, 「#06 Polychrome 100」, 「#05 Unglazed/black 25」들은 숫자나, 색깔, 그리고 일련번호 같은 기술적인 언어로 일관된다. 겉으로 보기에 이 제목들은 작품의 주제와는 전혀 연관성이 없어 보이지만, 캐띠 코에즈는 이 기념비적인 대우주를 형상화하는 드로잉의 이미지에 쉽게 간과되어 질 수 있는 소우주unit의 소소한 색깔과 개별적인 번호를 인식시킴으로써 소우주microcosm와 대우주macrocosm의 관계성을 회복시킨다. 이 관계성은 다름 아닌 우주의 충만한 순환의 질서임을 작가는 관객들에게 현시顯示하려는 것일 것이다. 이 순환의 연결고리는 불교의 경전 반야경般若經에 나오는 ”색즉시공 공즉시색色卽是空空卽是色“이라는 말을 환기시킨다. 대상對象을 형성하는 물질적인 색色은 우주의 빈 공간空으로 회기하고, 다시 그 깊고 충만한 공간空은 색色을 잉태한다.
캐띠 코에즈Cathy Coez의 조각 작품들은 ‘Bicephalous’와 ‘Black Figures’ 그리고 ‘Platine Figures’ 시리즈로 나누어진다. ‘Bicephalous’에서는 ‘Drawing Series’에서 보여진 기하학적인 도상의 이미지가 잔류해있지만, 전체적인 색상은 검은색 투명유를 입혀서 기계성과 구성적인 요소를 더욱 강조했다. ‘Black Figures’와 ‘Platine Figures’ 시리즈는 가장 최근 작품인 ‘Wartime Series’를 위한 구성적인 마켓축소모형,maquette에 불과하다. ‘Wartime Series’에서는 사병들이 도열하고 있는 듯한 전시의 풍광風光이 펼쳐진다. 사실 나는 작품 제목을 보기 전까지는 이 현란한 작품들이 ‘Clay Drawing’과 ‘Porcelain Drawing’ 시리즈의 연작 정도로만 생각했었다. 하지만 작품의 제목을 보는 순간 나는 흠칫 전율이 온몸을 타고 올라가는 것을 느꼈다. 작품의 이미지와 작가의 텍스트text가 일순간 섬광처럼 폭발되어 나의 의식을 진공상태로 만들었다. 그 전체적인 긴장감 속에 작은 조각상들을 세심히 들여다보면 도자기로 만든 다양한 인형들과 기하학적인 도상들이 현란히 얽히고설켜 키치kitsch적 혼돈을 앙상히 드러내고 있었다. 무엇보다 암호처럼 던져진 철학자 죠지스 산타야나Georges Santayana의 “Only the deads have seen the end of the war, 오직 죽은 자만이 전쟁이 끝나는 것을 볼 수 있을 뿐이다.”의 글은 더욱 나를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서정적인 미니멀리즘을 추구하던 작가가 ‘전쟁’의 서사성을 들추어 낸 것은 무슨 연유일까?
캐띠 코에즈Cathy Coez는 이미 ‘Black Figures’와 ‘Platine Figures’ 시리즈에서 상당한 주제의 변화를 암시하고 있었다. 작가는 집안 한켠에 자리잡고 있던 싸구려 도자기 인형들과 기하학적인 도상들을 석고로 캐스팅한 후에, 다시 그것들을 구성적으로 재배치시킴으로써 키치적 사물들이 지니고 있는 개별적이고 고유한 언어적 정의를 과감히 부정한다. 그것은 사물이 몸담고 있던 기존의 익숙한 환경에서 그 사물을 분리시키고, 다른 낯선 환경을 지닌 사물과 다시 병치시킴으로써 나타나는 ‘낯설게 하기’라는 표현주의적 효과를 통해서 이루어진다. 하지만, 작품에서 표현주의적인 깊이를 느낄 수 없는 것은 관객들이 작품에 몰입할 수 없을 만큼의 적당한 심리적 ‘거리감’이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이것은 도자기 인형과 도상의 이미지보다는 작품 전체의 율동감과 구성의 힘이 표현주의적인 기운을 억제하기 때문이다. 이 지점에서 작품은 여전히 미니멀리즘의 잔해를 남긴다.  

 

일부 내용이 생략됩니다. 월간도예 2011.03월호를 참조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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