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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1.02월호 | 특집 ]

작가의 눈으로 작품 들여다보기
  • 편집부
  • 등록 2011-04-12 13:42:00
  • 수정 2011-04-13 10:2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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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창현 도예가

 

내가 다른 도예 작가의 작품을 보는 관점은 주로 세 가지의 ‘편견’에 의존한다. 그것은 ‘시각적 문법visual grammar’, ‘개념concept’, 그리고 흙과 유약이 지니는 ‘물성materiality’과 ‘기술technique’이다. 이것을 편견이라고 말하는 것은 지난 세기 ‘현대미술’의 거대한 지각변동을 많은 비평가나, 철학자, 혹은 동시대의 예술가들이 치밀하게 예측하지 못했고, 그 어떤 가능성을 지닌 작품군과 작가들을 간과해온 지난 현대 미술의 역사를 돌이켜 봤을 때, 우리가 작품을 보는 관점이 얼마나 ‘오류성’과 ‘편파성’에 노출될 수밖에 없는지를 자성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래서 겸손하게나마 ‘편견’이라는 말을 쓰지만, 사실 그 말은 내가 타인의 작품을 알뜰히 잘 알 수 없다는 자조自嘲적인 여운이 깔려있다. 사람을 대하는 일도 이와 마찬가지인 것 같다. 어떤 사람을 소개받을 때, 우리는 그 사람의 외모, 학력, 직업, 그리고 대략적인 성격을 누군가에게 듣고 그 사람을 판단한다. 하지만, 그 사람을 지금 이 순간 어떻게 판단할 것인가? 중요한 건 아무리 타인의 훌륭한 평가가 나의 뇌리 속에 남아있어도, 나의 지난 경험과 나의 생체 리듬이 그를 거부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나의 무의식 속에 ‘선험先驗, 경험에 앞서 선천적으로 가능한 인식 능력’이라는 이름으로 퇴적되어 있던 어떤 기운과 리듬이 나의 시지각에 영향을 미치고, 그것은 나의 편견을 유도한다. 이것을 ‘궁합’이라고 해도 무방할 것인가? 비평가, 혹은 큐레이터들과 맞지 않은 궁합 때문에 홀대해진 작품들은 그동안 얼마나 또 많았던가?
세 가지의 편견 중에서 첫 번째는 ‘시각적 문법visual grammar’이다. 작가가 오랫동안 천착해온, 그리고 무의식적으로, 혹은 의도적으로 반복성 지닌 형태적 구성을 일컫는 말이다. 우리를 한 눈에 사로잡을 수 있는 독창적인 시각적 문법을 개발한다는 것은 결코 녹녹치 않은 일이다. 필자가 연구기자로 있었던 미국의 아메리칸 세라믹스 잡지사American Ceramics Magazine에선 하루에 수십 명의 신진 작가들과 기성 작가들이 자신의 새로운 작품들을 어필하기 위해 잡지사에 몸소 들린다. 그들은 편집자의 시선을 사로잡기 위해 자신이 기획한 포트폴리오를 최대한 어필한다. 짧은 시간 안에 편집자의 시선에 들어오지 못하는 작품들은 작가의 심오한 ‘개념과 의도’는 무시된 채, 또 다른 인고의 세월을 견뎌야 한다. ‘좀 더 내공을 쌓아야만 작품을 어필할 수 있을 것인가? 아니면, 천재 작가를 알아보지 못하는 세상을 원망할 것인가?’ 씁쓸히 발길을 돌리는 아직 주목을 받지 못한 중진 작가들의 뒷태가 몹시도 안쓰러워 보이는 것은 같은 작가로서 저 뒷모습이 미래의 나의 모습이 될 수도 있다는 연민과 불안감에서였다. 그러면 여기서 우리는 어떻게 도자 작품을 감상하는 것이 효과적이고 효율적인 방법일까? 도대체 효과적인 작품 감상이라는 것이 존재하기라도 하는 것일까? 혹시 그 속에는 정치적인 일면들이 숨겨져 있지는 않을까? 5, 6년 전 이런 물음들을 안고 나는 백발의 파란 눈을 가진 편집자의 안색을 들여다보면서, 작가로서 작품에 대한 전략과 정치성에 관한 연구에 골몰한 적이 있었다.

현대 도예 작가들이 추구하는 ‘시각적 문법’은 크게 기하학을 이용한 ‘건축적 구조architectural structure’와 자연물을 모방한 ‘유기적 구조organic structure’로 나뉘어 진다.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접하는 인공물들을 보라. 그들은 거의 이 두 가지 분류 안에서 맴돌 것이다. 여기서 예외적인 작품들은 아방가르드적인 작품이다. 아방가르드avant-garde(전위군前衛軍, 전쟁에서 적의 중요기지를 타격하는 첫 임무를 맡는 특전사, 이들은 생존률이 가장 낮은 적진의 한가운데를 기습한다. 그들이 생존만 한다면, 전쟁의 승리는 자신들의 공이 될 것이다)라는 말이 암시하듯이 무시무시한 새로운 타입의 시각적 문법으로 적진비평가, 큐레이터, 관객으로 들어간다. 무시 못 할 내공과 철학, 그리고 천운이 따르면 작가는 승전할 것이지만, 그 확률은 극히 낮은 수치임은 자명하다. 하지만, 역사는 바로 그 무모한 자들의 것임을 잊지 말아야한다.

두 번째 편견인 ‘개념’과 세 번째 편견인 ‘물성과 기술’은 다음 여섯 명 작가의 작품을 보면서 ‘시각적 문법’과는 어떤 관계를 형성하는 지 알아보자.

사진1은 스웨덴 출신의 도예가 에바 힐드Eva Hild의 작품이다. 이 작품을 처음 보았을 때 무엇이 떠오르는가? 우선 하얀색의 굽이치는 파도나 물결을 연상시키는 유기적인 라인과 부피감이다. 에바 힐드는 ‘유기적 미니멀리즘’의 특징인 ‘반복성’과 ‘단순성’, 그리고 ‘현전성’을 이용한 ‘시각적인 문법’으로 관객들을 사로잡는다. 대부분의 관객들이 이 작품에서 ‘인간의 몸’을 연상하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에바 힐드는 대학에서 약학을 전공했다. 그래서 인간의 몸과 인체의 곡선에 관해서 오랫동안 천착해온 작가이다. 작가의 ‘개념concept’과 관객들의 감상이 일치하지 않았다. 이것이 현대미술이고, 프랑스의 후기 구조자인 롤랑바르트Roland Barthes가 말한 ‘저자작가의 죽음’이 연상되는 시점이다. 작가는 자신의 텍스트text의 의미를 고정불변의 것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일단 작가의 손을 떠난 작품은 각계각층의 관객에 따라 그 의미가 변용되거나, 때로는 왜곡되기도 한다는 뜻이다.
에바 힐드Eva Hild는 인체의 곡선을 추상화한 작업을 통해서 관객들에게 자연의 유기적 라인을 시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하지만 이 추상성은 관객들에게 작품에 대한 그 어떤 ‘의미’를 강요하지 않고 있다. 인간의 몸에서 영감을 받았던, 꽃봉오리의 주름과 라인에서 영감을 받았던 관객들은 크게 신경을 쓰지 않는다. 있는 그대로 보기 편한 작품이다. 작품의 ‘물성materiality과 기술technique’에 관한 감상은 그 다음에 따라온다. 흙이라는 가소성을 지닌 물질을 불에 구워 단단한 물질로 화석화시킨다는 것은 연금술적인 기술과 노하우가 필요하다. ‘어떻게 코일링coiling이라는 기술을 이용해서 이렇게 거대한 작품을 금도 하나도 없이 만들 수 있을까? 유약의 표면은 어떻게 처리해서 한 점의 핀홀pinhole도 없는 것일까?’ 이런 기술적인 질문들은 지극히 평범한 도예작가가 다른 작가의 작품을 보는 상투적이지만 매우 중요한 물음들이다. 
     
사진2는 미국 도예가 신시아 콘센티노Cynthia Consentino의 작품이다. 토끼의 탈을 쓰고 있는 여성의 누드를 사실적으로 표현한 작품이다. 이 작품에서는 에바 힐드Eva Hild와는 다른 감상의 기술이 요구된다. 에바 힐드의 작품에서는 작품의 개념concept에 관한한 ‘깊이에의 강요’가 느껴지지 않는 반면에, 신시아 콘센티노의 작품에서는 아름다운 여성의 몸과 토끼라는 다소 생경한 혹은 이질적인 생명체를 서로 결함시킴으로써 상당한 철학적인 담론을 생산해 낸다. 이 작품을 단순히 ‘재미있다’, ‘특이하다’라는 말로 일축한다면, 작가는 과연 어떤 생각을 가질 지 궁금하다. 작가는 작품에 대해서 좀 더 깊이 있게 다가설 수 있는 관객들을 선호할 것이다. 나는 어떤 작가의 작품 앞에서는 발길이 멈춰지고, 어떤 작가의 작품에는 일별一瞥도 주지 않은 채 발걸음을 재촉한다. 신시아 콘센티노의 작품 앞에서 한동안 멍하니 서있는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 얼굴을 알 수 없는 여인의 관능과 불길한 꿈에서만 나타날 법한 큰 토끼 머리의 미묘한 대조를 통해 ‘낯설게 하기 효과alienation & displacement’이라는 ‘개념concept’이 나의 의식을 한동안 사로잡았기 때문이다. 토끼의 탈과 불편한 동거를 하고 있는 여인의 아름다운 육체는 과연 무엇을 표현한 것인가? 작가인 나도 알 수가 없다. 그래서 나는 이런 종류의 작품 앞에서는 꼭 ‘작품 설명서artist statement’를 참고한다. 작가가 쓴 작품설명서는 자신의 작품에 대한 오랜 고민과 철학적인 사유를 함축적으로 담고 있다. 신시아 콘센티노의 작품 설명서에는 이렇게 쓰여져 있다. “나의 최근의 조각 작품에는 성gender, 사회적 역할, 그리고 문화적 인식이라는 다양한 이슈에 대해서 탐험하기 위한 신화적 혹은 동화적 인물들이 등장한다.” 어떤 작가의 작품설명서는 작품의 이미지를 훼손시킬 만큼의 참을 수 없는 가벼운 존재성을 드러내는 작품도 있다. 하지만, 이 작품은 서두부터 무언가 나의 뇌리를 강하게 잡아당기는 힘이 있다. 그것이 ‘개념concept’인 것이다.
     
사진3은 터키 출신의 도예가 케말 티즈골Kemal Tizgol의 작품이다. 작가는 철저하게 서사적인 이야기형식을 배제하고, 오로지 작품의 기하학적인 형태와 기술에만 천착해온 작가이다. 우리는 이런 작가군을 ‘형태주의자formalist’라고 부른다. 신시아 콘센티노Cynthia Consentino와 같이 이야기를 전개하는 네러티브 작가narrative artist와는 정 반대되는 작가로 이들 두 부류의 작가들은 절대 화해할 수 없는 다른 세상의 작품 세계를 전개시킨다. 케말 티즈골은 전통적이거나 장식적인 도자기의 접근법을 지양하고, 부드러운 표면과 경질硬質의 모서리, 그리고 육중하고 기념비적인 구조들이 작품의 주요한 특징이다. 사실 네러티브 아트narrative art에 대한 유난한 애착을 가지고 있었던 필자는 과거에 이런 형태주의자들에 대한 비호감을 가지고 있었음을 고백한다. 개념과 이슈가 부재한 보기 좋은 형태만 추구하는 이런 형태주의자들도 복잡한 개념을 전개시키는 네러티브 아티스트들의 전위적인 작품을 이해할 수 없어 보이는 것도 같은 맥락일 것이다. 우리가 한 세상을 살면서 어떻게 모든 이들을 이해하고 협력할 수 있으랴. 이 접점에서 ‘편견’이 발생함은 자명한 이치일 것이다.

일부 내용이 생략됩니다. 월간도예 2011.02월호를 참조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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