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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1.01월호 | 특집 ]

임무근 공예기술자가 아닌 참다운 공예지식인을 키워야한다
  • 편집부
  • 등록 2011-03-03 12:25:15
  • 수정 2011-03-03 12:5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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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예는 한 시대의 기술과 경제, 예술, 사상, 신앙, 생활습속 등 사회,
문화 전반과 연결되어 있다. 아는 것만큼 보인다고 하지 않나.
문화 전반에 관한 지식을 배경으로 도예를 보면 더 많이 보이고
제작자의 경우에도 더욱 의미가 깊은 작품을 제작하게 될 것이다.

 

공예교육자로써 정립하신 ‘공예’라는 어원적 의미는 무엇입니까
‘공예’라는 단어는 중국 송나라 때부터 써온 단어야. 우리가 미술이라고 부르는 넓은 범위가 중국에서는 공예라고 불리운 것이지. 청나라 때에는 문학까지도 공예에 포함됐어. 그리고 우리나라에 들어온 공예라는 단어는 일본을 거쳐서 들어온 단어이기도 해. Industrial Art라고 하는 단어가 당시 영국에서 회자됐던 때가 있어. 영국은 1750부터 100년간 산업혁명이 진행됐고 1851년에 세계최초로 만국박람회를 개최한 역사로 인해 Industrial Art라는 것이 지닌 중요성을 깨달은 것이야. 처음에는 영국이 시작했지만 주변의 유럽국가들이 함께 산업혁명을 일으키면서 깨달은 것이 디자인의 중요성이야. 일본도 유럽의 산업혁명을 체험한 후 Industrial Art가 무엇인지 보고 왔지. 그 이후 일본인들이 Industrial을 ‘공업’으로, Art라는 말을 ‘예’로 해석한거야. 그리고 그들이 다시 공예라는 말을 해석했지. 초기 일본에서 공예라는 단어가 나왔을 때에는 산업의 의미도 모두 포함한 것이었어. 이후 조선시대에도 공예를 발달시켜야 한다는 주장이 나온 일이 있었지. 일본이 조선을 병탄하던시기 조선왕조는 문화적 저항을 위해 ‘이왕직 미술연구소’를 만들어 전통적공예를 살려보고자 했어. 국권으로 회복하기 위해 조정에서 벌인 작은 운동이었지. 그 당시 정립된 것이 도자, 금속, 염직, 나무라는 다양한 공예였어. 그것이 지금까지 내려온 거지. 내가 교육자로 몸담았던 서울여대도 공예과가 있잖아. 그것에 쓰이는 단어도 Industrial Art야. 예술이라고 하는 개념은 좁지 않고 넓게 열려있어. 이같은 상황을 의식하고 있다면 도예는 이 작은 울타리 안에서 벗어나야해. 이것은 동양이나 서양이나 같은 생각이야. 서양의 단어 중 technology의 어원인 techne라는 단어가 있어. 이 단어 속에는 미술과 도자기, 염직, 구두수선 등 모든 것이 포함돼 있었어. 이후에 분화된 것이지. 우리가 쓰는 주요한 말은 그 어원이나 명칭에 대해 정확히 파악하고 써야 한다 생각해.

이 시대 ‘공예’라는 단어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말(언어)이라는 것은 시간과 공간 속에서 항상 살아 존재하기 때문에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하는 것이 많아. 공예는 인간이 지구에 존재하는 한 없어지지 않아. 공예품은 우리 육신의 증거품이라 할 수 있는것이지. 식탁이 없다면 바닥에서 음식을 먹는단 말이야. 옷이 없으면 어떡해? 음식과 옷을 택한 육신이 변하지 않는 한 공예(품)는 존재할 것이야. 현재는 산업이라는 분야로 공예라는 단어가 옮겨갔어. 대량생산이 주목적이 되어간단 의미이지. 작금의 전업공예가들이 만드는 작품들은 이것과 상대가 안되지. 수요가 있어야 공급이 있는데 이미 대량생산 돼있다면 힘들잖아. 값이 안 맞아서. 우리 도예 분야 또한 예술이라는 분야에 속해 있어. 물론 항아리나 사발 등 쓰임이 있는 것도 있지만 쓰임만 있는 것은 아니잖아. 우리가 듣는 클래식 음악과 트롯트 음악은 사람마다의 취향의 차이지 각 사람에게 감동을 주는 분량은 비슷할 수 있는 것이야. 어떤 경우에는 같은 학문에서 얘기하는 단어임에도  모두 달라서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어. 어떤 이들은 공예란 손으로 만들었기에 공예라고 주장하기도 해. 용도를 신경쓰지 않고 기계냐, 사람의 손이냐만을 두고 선택기준을 세운것이지. 우리가 살아가는데 필요한 것을 만들어내는 모든 것이 공예야. 공산품이냐 공예품이냐라는 것은 두 번째 문제지. 본질에 있어서는 공예의 정신이 들어간 것이야.

도예 입문 당시 상황과 교육자의 길을 선택한 계기를 듣고 싶습니다
대학에 들어와서 도예를 시작했어. 한국에서 1955년에 한국조형문화연구소가 만들어졌고 그 다음해에 현 간송미술관 자리에 가마가 만들어졌지. 1956년, 내 나이 중학교 2학년때 미술반에 들었어. 그곳에서 도자를 처음 접했지. 당시만 해도 도자기를 만드는 것에 대한 생각은 없었고 도자기에 그림만 그리는 수준이었지. 그리고 고등학교 3학년 때 권순형 교수님이 미국에서 공부하고 한국으로 돌아와 가르친 야간 도예실기수업을 듣고 성형기법을 익혔지. 당시 그 수업에서 다양한 색감을 나타내는 유약을 보는 것이 신기했던 기억이야.
1958년 내가 서울대학교에 입학했을 당시 미국의 ICAInternational Cooperative Alliance 국제협동조합연맹, 원조를 받아 남대문 근처에 한국공예시범소가 만들어졌어. 그 안에 도자분야 시설도 마련됐어. 그곳은 전기물레도 비치돼있었고 슬립캐스팅 작업이 가능한 시설과 1150도까지 번조할 수 있는 전기가마도 구비돼 있었어. 그리고 2, 3년 후 이곳에 있던 실습도구들이 서울대학으로 넘어왔지. 내가 대학 3학년때 일이야. 그 전에는 색연필을 이용해 렌더링으로 도자기를 그리거나 아니면 방학 때 경기도 이천의 요장을 찾아가 도자를 공부했어. 당시 작품을 가마에 구웠는데 본래는 1150도밖에 구워지지 않는 가마 온도를 1250도를 높여 번조해 가마를 고장 낸 경우도 있어. 그 결과물로 나온 작업의 이미지가 좋아 국전(대한민국 미술 전람회)에 냈더니 특선이 된거야. 당시 스스로 도자기를 잘 하는것 같다라는 생각도 했지. 이후 연이은 국전에 출품해 네차례 특선을 했어. 그 결과 국전(대한민국 미술 전람회)의 최연소 추천작가가 됐지. 군대 제대 후 디자인포장센터에 1년간 일하면서 인천의 중앙도자에서 작품도 가마에 굽고하다가 서울여대에 들어가 교수로 재직하게 된거야. 처음에 대학에 입학 했을때 난 응용미술과였어. 다양한 여러 분야를 공부했지. 그리고 졸업 후 시각디자인을 공부하려는 계획이 있었지만 국전에 입상하고나니 자신감이 생겨 결국 공예가로 남게 된거야.

한국 대학도예의 최초 형성과정과 당시의 상황이 궁금합니다
대학에 도예과가 만들어질 당시만 해도 금속활자와 고려청자, 한글, 가을의 맑은 하늘이 한국의 자랑거리였지. 한국사람이라면 누구나 고려청자가 유명하다는 것은 다 알았지. 당시 이화여대에서 가장 먼저 한국의 문화를 올바로 정착시키기 위해 도예과를 만들었어. 이후 도예연구소 연구원으로 황종구씨가 왔고 1961년 정식으로 교수가 됐지. 또한 당시 박정희 대통령을 도와 각종 건설업 차트를 그려냈던 권순형 서울대 교수가 대통령에게 직접 간청해 학교에 가마를 만들어달라고 했어. 그래서 1968년 서울대에도 가마가 만들어졌고 또한 홍익대에도 가마가 생겼어. 당시에는 내화판이 너무나 소중했지. 인천의 요강 공장을 매일 찾아가 내화판을 가져다 썼어. 초기의 내화판은 열을 받으면 판이 휘어졌거든. 그러면 뒤집어쓰곤 했어. 내화판이 소중했기 때문에 웃지못할 에피소드도 있어. 어떤 학생들은 그 무거운 내화판을 가방에 넣어가지고 다닐 정도였으니까. 개인사물함에 넣고 잠가놓기도 했지. 세월이 많이 흘러 교수가 된 이후에 학생들이 가끔 내화판을 밟고 다나는 모습을 보면 나도 모르게 화를 낸 적도 있었지. 또한 당시의 가마는 석유가마였어. 가마 번조중에 석유가 떨어지면 주유소에 뛰어가 석유를 받아다 나르곤 했었어. 아주 열악한 환경에서 도예를 배웠지. 최근에는 아예 도시가스를 끌어와 가마를 설치하니 많이 발전한거야.

 

일부 내용이 생략됩니다. 월간도예 2011.01월호를 참조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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