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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1.01월호 | 특집 ]

정양모 흙의 본질을 인식하면 자연의 이치를 깨닫는다
  • 편집부
  • 등록 2011-03-03 12:22:30
  • 수정 2011-03-03 12:56: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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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도자문화 선진국으로 우뚝 서자
우리나라는 중국과 함께 세계에서 가장 먼저 8세기와 9세기에 양질의 청자와 백자를 만들었다. 지금 세계도자시장을 석권하고 있는 일본과 유럽은 17세기와 18세기에야 비로서 자기를 만들기 시작했다. 우리 도자기의 전통은 이와 같이 그 역사가 오래됐을 뿐만 아니라 그 질이 뛰어나고 독창적이고 아름다워 전 세계적으로 누구나 높이 평가하고 있다. 우리의 청자, 분청사기, 백자 문화는 우리의 자존심이고 긍지임에도 불구하고 이를 계승·발전시키지 못했다. 따라서 우리는 지금 우리 도자문화의 수준이 어느 정도이고 전 세계에서 우리 도자문화가 차지하고 있는 비중은 어느 정도인가를 냉철히 따져보고 스스로 우리의 위치가 어디쯤인가를 절감해야 한다. 지금 우리 도자문화는 여러 면에서 선진도자문화국에서 많이 뒤쳐져 있다. 바야흐로 지금은 우리가 분발해서 우리의 전통도자에서 독창성과 독특한 아름다움을 현대에 되살려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 전통도 알고 도자선진국의 도자문화도 널리 섭렵하여 그들의 독창성과 독특한 아름다움이 우리 도자문화 발전에 큰 힘이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또한 우리 전통도자문화의 우수성과 조형정신들을 세계 곳곳에 널리 알려야 할 것이다.
우리의 정신과 핏줄 속에는 우수한 전통도자문화를 창조해냈던 그 정신의 역량이 맥맥히 흐르고 있다. 우리는 자신을 가지고 열심히 연구하고 노력하여 선진도자문화국의 위치를 다시 찾기 위해 우리의 역량을 다져나가야 할 것이다.

 

한국과 일본의 도자사적 배경에 대한 선생님의 견해를 듣고 싶습니다
임진왜란은 도자기 전쟁이야. 일본인들도 상당부분 인정한 것이야. 그때까지 일본은 도기를 만들 수는 있어도 자기를 만들지는 못했어. 식사를 위해 도기에 밥을 퍼 담으면 밥알이 다 붙었지. 하지만 자기에는 붙지 않거든. 일본은 자기 제작에 상당히 뒤떨어져 있었어. 일본의 임진왜란이 대륙으로의 진출확장이 목표이기도 하지만 자기를 원한 부분이 분명히 있었어. 포셀린을 가지고 싶어 했다는 의미야. 한국사람은 임진왜란 이전에 늘 자기를 써 왔기에 일본인들이 참 부러워했지. 그래서 일본인들이 기병대를 데리고 내륙까지 쳐들어와 도공을 데려간거야. 자기기술자. 백토를 아는 자, 가마를 지을 수 있는 자, 그 외에도 의사, 염색기술자 등 필요로하는 기술자들이 있다면 다 잡아갔어. 현재 많은 일본인들이 1915년에 자신들의 손으로 자기를 만들었다고 얘기를 해. 임진왜란이 1592년부터 1597년까지 일어났잖아. 그 사이에 일본인이 수천 명의 조선인을 잡아갔어. 하지만 그와 무관하게 자기들은 자신들의 손으로 만들었다고 주장하고 있지. 일본은 현재에도 자기라는 말은 잘 안써. 도기라고 하지. 도기는 쓰는 만큼 변화가 있어. 다도를 위해 차를 오래 마시면 찻물이 그 속에 스며들고 찻잎이나 가루가 끼기도 하는 것이야. 따라서 자기를 너무나 중요하게 생각했어. 또한 일본 사람들은 과거에 도자기를 닦아서 쓰지 않았어. 그것조차 역사의 흔적이라고 생각했지. 하지만 한국이 변화하는 것은 놔두지 않았지.
사실 도예라는 말도 일본말의 잔재야. 지금도 한국에서는 도예라는 말을 쓰자나. 학교에서 쓰는 단어도 도예과. 우리는 9세기부터 청자, 백자를 만들어왔단 말이야. 물론 중국이 한국보다는 빨랐지만 말이야. 중국과 한국을 뺀 다른 어느 나라에서도 자기를 쓰지는 않았었어. 난 우리 후배들에게 늘 도예라는 단어는 일본어라고 강조해. 하지만 느끼질 못해. 도자예술이라는 단어가 괜찮아. 월간도예도 마찬가지야. 월간도자가 맞지.

일제강점기와 6.25전쟁 당시 학창시절은 어떻게 보내셨습니까
일제시대에 태어난 나는 학교 수업에 많이 빠지곤 했어. 일본인들이 우리 아버지를 감시해서인데 아버지 이름이 숙청명단에 들어있었기 때문이야. 일제시대 말기에는 암살자 명단이 만들어졌는데 그곳에 독립운동자들 명단이 빼곡히 적혀있었어. 당시 나는 초등학교를 2년 정도밖에 다니질 못했었어. 게다가 6.25전쟁이 일어나서 피난을 가야했기 때문에 정신없었지. 1.4후퇴 때 부산에서 또 1년간 학교를 못 다니고. 거의 4년을 공부를 못 한거야. 이후 부산 영도에 경복고등학교가 생겼다는 소식을 들었어. 전쟁 통에 만들어진 학교라 영도 근처 산에 천막치고 만들어진 고등학교였어. 한 학교에 40~50명씩 인원을 받았어. 그리고는 선생님이 학년을 정했지. “넌 장난꾸러기니 고등학교 1학년. 넌 중학교 3학년. 넌 얌전하니까 고등학교 2학년으로 해” 그래서 난 고등학교 2학년이 됐어. 그렇게 중3에서 바로 고2가 됐지. 그러니 수 년 공부를 못한 거야. 그리고 고등학교 3학년 때 서울로 돌아왔어. 그리고 서울대학교 물리대 사학과를 시험을 보고 입학하게 됐지.

대학 졸업 후 국립중앙박물관 관장이 되시기까지 과정이 궁금합니다
서울대학교 물리대 사학과에서 순수학문을 공부하고 졸업 후 1958년 공군사관학교 교관으로 들어갔어. 그때가 공군사관학교 초기 시절이기 때문에 처음에는 경상남도 진해로 발령이 났어. 그리고 다시 서울 대방동의 공군사관학교로 왔지. 교관 당시에 사관생도를 데리고 박물관을 찾아가서 우리 문화에 대해 많은 설명을 하는 기회가 있었고 많은 관심이 생겼어. 교관을 관둔 후에는 내가 무슨 일을 할지 주변에서 관심들이 많았지. 1962년 제대한 후 경주박물관과 국립중앙박물관에 들어갔어. 그리고 1973년도에 경주박물관장으로 갔지. 그때 내 나이 39살이었지. 2년 뒤 서울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옮겨 학예연구실장으로 있었지만 당시 박인호 경주박물관장이 61세에 정년퇴임하고 1984년 내가 다시 관장으로 부임됐어. 지금이야 박물관에서 일하면 괜찮겠지만 그때는 박물관이 보수가 적어 들어오려는 사람이 없었거든. 우리 때에는 박물관이 유망한 직종이 아니었어. 이후 1993년 국립중앙박물관장으로 부임됐지.
지난해 G20회의 중 국립중앙박물관에서의 만찬에 대해 감회가 남다르실 듯 합니다
지난 11월 G20정상회의 일정 중에 국립중앙박물관에서 만찬을 가진 것에 대해 매우 자랑스럽게 생각해. 한국고유의 예술문화를 전 세계에 알리고 우리 문화보존장소가 이만큼 성장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만으로도 매우 큰 의미있는 기획이었다고 생각해. 물론 호텔같이 고급스럽진 않았겠지만 우리 문화를 세계에 각인시키에 최적의 장소였다고 생각해. 뉴욕의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 가보면 직원식당과 일반식당 등 여러개의 식당이 있지. 그 중 일반식당에는 늘상 외국의 귀빈들을 초대하고 있어. 그들 나라에 대한 문화를 자연스럽게 선보이고 각인시키고 싶은 거지. 이제 우리도 박물관 미술관 문화가 그렇게 돼야한다고 생각해. 이 같은 홍보력의 결과로 매트로폴리탄 미술관에는 하루에도 내외국인 수만 명 이상의 관람객들이 찾아온다고. 그런 점에 있어 한국은 부족한 부분이 많지.

 

일부 내용이 생략됩니다. 월간도예 2011.01월호를 참조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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