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의 문화文化는 그 나라를 강대국으로 만든다. 특히 도자문화文化는
영구적永久的인 불멸의 힘을 갖고 그 나라의 힘을 지니고 가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도자문화文化는 세계世界에서 가장 으뜸가는 나라의 힘을 지니고
가는 유일唯一한 문화文化유산이다. 앞으로도 많은 우수한 도자문화文化는
역사성歷史性있는 보물로서 우리나라를 발전시킴을 자부한다.
선생님께서 도자에 입문하신 계기를 듣고 싶습니다.
도자기를 제일 처음 시작한 것은 1959년도 이화여자대학교 대학원에 입학하면서였지. 8월 15일 해방되고 다음해인 1946년 5월에 이화여대 서양화과에 들어갔어. 그러니까 이화여대 2회 출신이야. 졸업 후 풍문여자고등학교에서 선생 노릇하고 그림을 그렸지. 32살이 되서는 대학원 도예과에 입학해서 대학원 졸업하자마자 강의를 했어. 도예과에서는 당시 유명했던 김인승 서양화가의 가르침을 받았어. 당시 도자기를 가르친 사람은 없었어. 청자기술이 좋은 오빠(황종구)가 선생노릇을 했지. 우리나라에 도자교육을 시작한 사람은 나와 황종구 선생이야. 처음에는 오빠가 교수는 안한다고 했지만 내가 설득했어. 6.25사변 직후라 시골에서 슈퍼마켓을 하며 전전긍긍하던 오빠에게 후배를 양성해야한다고 했어. 하지만 사업하는 사람이라 처음에는 선생노릇은 안한다고 한거야. 나라가 이 모양인데 지금 사업하면 성공하겠느냐며 도자분야 활성화를 위해 제자 양성에 힘쓰라고 했지. 그래서 나도 풍문여고 교사를 관두고 32살에 이화여대 대학원에 갔지.
선친이신 도예가 황인춘 선생님은 어떤 분이셨는지요
난 고향이 서울이야. 1935년 아버지(황인춘 도예가)는 서울 대방동에서 청자요를 시작했어. 그리고 내가 초등학교 1학년인 1937년에 개성으로 갔지. 난 그곳에서 고등학교까지 다녔어. 당시 여자고등학교로는 경기고녀(여고)와 호수돈고녀(여고)가 있었는데 현재 대전에 있는 호수돈여고가 그때는 개성에 있었거든. 그래서 난 호수돈고녀를 다녔지.
당시 일본총독부가 흙이 좋아 고려왕토라 부르던 개성 땅으로 아버지를 보냈던거야. 그곳이 흙이 좋다며 작업장을 만들어 주었지. 현재 개성공단자리가 그 작업장 자리였어. 그곳에서 아버지는 가마와 작업실을 지어 청자를 만들어냈어. 만든 청자는 팔기 위해 대부분 다시 서울로 보내졌어. 일본 사람들도 아버지 청자를 대단하다 여겨 함부로 하지 못했지. 아버지는 그 시절 양복 입고 다닌 멋쟁이였어. 하얀 백구두와 하얀 양복에 참 멋졌던 분이셨어. 6.25사변 직전에 돌아가셨지만 말이야. 암으로 돌아가셨어. 현재 아버지 묘도 개성공단 자리에 있어. 공단 들어서고 나서 지금이야 묘도 사라졌겠지만...
여러 어려운 현실 속에서 미술대학 입학을 선택하신 이유와 입학과정이 궁금합니다
당시에는 내 나이에 초등학교도 못나온 사람도 많았어. 아버지가 가지 못하게 막았지만 내가 가야겠다고 했어. 대학에 간다니까 말만한 처녀가 어딜 서울을 가냐고 했지. 안보내셨어. 하지만 내가 몰래 이화여대 서양화과에 입학 수속을 한거야. 요새 같으면 대학 꼭 가라고 하잖아. 몰래 입학수속을 한 다음 시험을 치려고 아버지 몰래 보름 전 집에서 가출을 했어. 시험치려고 서울 영등포에 있는 외가집에 갔지. 시험 당일날 영등포에서 전차타고 아침 5시에 출발해서 겨우 8시쯤 이화여대에 도착했어. 그리고는 시험장에 들어섰는데 서울에서 온 아이들은 목탄지에 멋지게 뎃생을 그렸지만 난 시골에서 와서 목탄지는 구경도 못한 상태였어. 난 작은 스케치북하나 달랑 가지고 왔지. 연필하고. 그땐 학교에서 준비하는게 아니라 준비물은 각자가 챙겨 가야 했거든. 그리고는 석고소묘가 시작됐지. 세시간 시험인데 난 한시간만에 끝나고 엎드려 잤어. 아침에 일찍 와서 너무 피곤했던거야. 그리고 합격발표 날 떨려서 사촌동생한테 가서 합격했나 확인해달라고 부탁했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 나도 같이 갔지. 남들처럼 준비가 확실한 것도 아니었고 연필로 한 시간만에 그렸는데 붙을리야 있었냐만은 놀랍게도 3등으로 합격했어. 깜짝 놀랐지. 사실 난 초등학교 때부터 그림을 그려왔어. 누구한테 배운건 아니지만 좋아서 마냥 시간이 날 때마다 그림을 그렸었지. 지금이야 편하게들 공부하지만 그때 난 너무 힘들었어. 합격통지서를 가지고 집으로 돌아왔는데 아버지께서 내말을 듣지 않았기 때문에 넌 내 딸이 아니라며 야단을 치셨어. 화가 나서 아버지 작업장에서 말도 안하고 일만 했어. 나름대로 시위를 한 거지. 며칠 뒤 아버지가 부르더니 내년에 학교가라고 하시더라고. 내년에 또 어떻게 시험을 치냐며 합격할 것이라는 보장도 없다며 당장 가고 싶다며 우겼어. 그러더니 결국 입학금 내는 마지막날 간신히 보내주시더라고. 이후 졸업을 앞둔 대학 4학년에 약혼을 했어. 내 나이 24살쯤이야.
해방직후 교사로 활동할 당시 시대 상황은 어땠습니까
8.15 해방 당시 고등학생이었는데 “청년이어 일어서라! 궐기하라!”며 주변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았어. 일제시대에 나도 압박을 많이 받았었지. 곡괭이질과 수레질 등 수업시간 외에는 늘 노동이 이어졌거든. 남학생들은 전쟁일선에 내보내 나가서 다 죽게 만들고 말이야. 그때 분노가 지금도 생생해. 그때 생각했어. 내가 선생님이 되겠다고. 배워야 나라를 위해 일하지. 공부를 해야 뭐라도 하지. 나도 공부를 해야 되겠다며 아버지를 설득했던 거야. 대학에 가겠다고. 그렇게 미술대학을 갔지. 그런데 대학을 갔지만 한글을 모르는 상태였어. 오로지 일본어만 사용해 와서 한글을 몰랐던 거야. 한국말하면 일본인들한테 크게 당했으니까. 친구한테 한글이건 영어건 배워서 공부했어. 어떻게든 공부해서 나라를 일으켜야했거든. 지금 젊은이들은 그때 심정 절대 알 수 없을 거야. 우리 후손들은 나와 같은 고생을 하지 않고 공부할 수 있도록 해야겠다가 내 생활신조 였어. 그래서 가출하면서까지 대학을 가고 싶었고. 대학 졸업 후 내 야심은 미국 유학 이었어. 하지만 학교에서의 부탁으로 풍문여자고등학교 미술선생님으로 부임했지. 당시 학교에서도 시위 운동의 횟수가 너무 많았어. 그것을 내 힘으로 막았었지. 우린 같은 배를 타고 간다며 선생님과 제자로서 우린 한 운명이라며 학생들을 설득하고 막아섰던 적도 있었지.
첫 도예전시를 가졌던 일본에서 느끼신 감정은 어떠셨는지요
이후 1968년에 일본에 가서 첫 전시와 세미나를 갖게됐어. 나고야에 가서 도자기 공장과 원료가 생산되는 와목청토 생산지를 시찰하고 동경으로 갔어. 동경에 갔더니 한국에서 도예가가 왔다며 외무성으로부터 전화가 오기까지 했어. 외무대신을 만나 내 프로필을 보여주며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지. 당시 전시를 목적으로 일본을 방문한 건 한국작가로는 내가 처음이었으니까. 문화적으로 많은 교류에 힘쓰자며 이야기를 했지. 그리고 저녁을 먹는데 밥이 안 넘어가는 거야. 속에서 울화통이 터지는거야. 한국이 일본 도자기 기술과 문화에 거의 100년 가까이 뒤진 상황을 직접 봤기 때문이야. 그게 분통이 터져서 우리 조상도 원망했지. 그리고 밤새도록 울었어. 우리에게 배워간 도자기인데 일본은 우리보다 한참 멀리 가버렸다는 생각 때문에 너무나도 억울했어.
한국에 돌아와서 한 달 뒤인 1968년 12월에 이화여대 입구 근처에 도자기연구소를 냈어. 그곳에서 한국인 외에도 독일. 일본, 미국, 이태리 사람들에게 도자기를 가르쳤어. 그들에게 진정한 한국도예가 무엇인지 보여주고 싶었어. 이것이 한국도자기연구소의 시작이었어. 연구소는 1972년도까지 운영됐어. 그 이후 지금 작업실이 생긴거야. 이렇게 나름 한국도자의 전방에서 열심히 활동한 덕에 1975년도에는 일본 요업협회 초청 특강을 하기도 했지. 거기서 일본도예인들을 대상으로 한국도자기에 대해 강의를 했지.
60년 전 한국의 도예계는 어떤 상황이었습니까
1959 이화여대에서 대학원 생활을 하고 있을 때야. 경기도 이천을 자주 찾아가 당시 옹기가마에서 도자기 실험을 하는 유근형에게 오빠 황종구가 다양한 기법을 많이 가르쳐줬어. 그리고 신상호에게도 기물이 가마에서 완성되는 과정과 쇠꼬챙이 등을 이용해 확인하는 방법, 온도에 따른 기물의 색깔 등 다양한 기술을 알려주기도 했어. 또 서울 인근 대학의 도예과 학생들을 방학 때마다 이천으로 보내 도자기를 배우게 했어. 당시만 해도 학교 상황들이 안좋았기 때문에 가마나 물레도 준비가 안되있었거든. 그래서 경기도 이천까지 내려가서 도자기를 배웠던 거야.
일부 내용이 생략됩니다. 월간도예 2011.01월호를 참조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