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리고 있는 <흙으로 빚은 아시아의 꿈>전은 아시아 민족조형문화연구가 가네코 가즈시게(1925~)가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한 1,020점의 기증품 중 흙으로 제작된 작품만을 선정해 선보이는 전시이다. 이번호부터 3회에 걸쳐 《흙의 민족조형》을 주제로 한 ‘가네코 가즈시게’의 연구 논문을 게재한다.
가네코 카즈시게金子量重
아시아민족조형문화연구소장, 아시아민족조형학회장
대표작품을 통해 본 아시아의 흙의 조형
1) 식食
네팔, 산의 민족 토기
영봉靈峰 히말라야로에 위치한 네팔은, 다양한 축제와 풍부한 생활 문화를 가지고 있다. 수도 카트만두 교외의 티미는 비옥한 논밭의 조용한 농촌이다. 이곳에서는 수백 년 전부터 토기와 함께, 점토에 종이를 섞어 만드는 ‘지소가면紙塑假面’을 만들어 왔다. 길 양쪽으로 3층짜리 벽돌집이 십여 채 늘어서 있고, 그 앞에는 돗자리 위에서 고추를 말리고 있다. 2층의 돌출된 창가나 기와 밑에 토기와 커다란 동물 토우를 늘어놓고 솜씨를 자랑한다.
신상무늬 항아리
이 항아리는 상하 3단으로 시마, 가네샤 등 힌두교 신들이 양각되어 있다. 이것은 네와르 족의 명문가로 알려진 슈레스타 가의 혼례 행사와 관련이 있는 항아리이다. 혼례가 치러지기 나흘 전부터 집안은 친척들에게 사리와 금, 은 등의 축하 선물을 보내는 일로 분주해진다. 이 항아리에는 밀가루에 흑설탕을 넣어 반죽하여 튀긴 과자 모리를 신부의 가족 수대로 담아두는데, 친청 어머니가 시집가는 딸에게 마지막으로 정성을 담아 준비하는 선물이라고 할 수 있다. 네팔은 예부터 며느리들이 많은 가사 일을 떠맡아 왔는데, 수십 명이 넘는 가족의 경우 며느리는 늦은 밤까지 쉴 겨를이 없다. 늦은 밤 며느리는 친정어머니에게서 받은 항아리 중 하나를 열어 과자를 꺼내 먹으면서, 때로는 눈물도 짓게 되는 것이다. 항아리(모리코시)에 들어있는 과자는 ‘코시모리’라고 부른다. (도1)
2) 주住
네팔, 20세기 화로
봄부터 수확기까지는 밭일에 쫓기지만, 농한기가 되면 도자기를 만드는 일에 정성을 다한다. 가까운 밭에서 퍼온 점토를 대형의 물레에 올려놓고, 긴 막대기를 물레의 구멍에 꽂아 넣어 힘껏 회전시키면, 원심력에 의해 수 분 동안 계속해서 돌아가게 된다. 그릇의 표면 중간 정도에 도드라진 띠를 두르고, 그 위에 점토의 틀을 이용하여 꽃문양을 찍어 넣는다. 접어서 구부린 주둥이 부분에도 여러 가지 문양을 찍어 넣는다. 이러한 그릇을 만드는 도공이 이제는 모두 없어졌지만, 오랜 세월 사용해 온 화로는 가마터에서 건조용으로 사용하고 있었다.(도2)
3) 신앙信仰
태국 반치앙 유적 토기
반치앙 유적은 태국의 동북쪽 우동 타니 현縣 치앙 마을에 위치한다. 발굴 현장에서는 이들 토기가 모두 집 아래에서 여러 층을 이루며 발견되었다. 죽은 이를 땅에 묻고 다른 곳으로 이주하였다가 다시 이 곳으로 돌아와 얼마간 살다가 죽은 이가 생기면 묻고 다시 다른 곳으로 이주하는 것을 반복한 것으로 보인다.
가장 아래층에서는 새김무늬단지黑色刻文土器, 기원전 10세기 전후(도3), 그 위층에서는 회색 새김무늬단지灰色刻文土器, 가운데층에서는 붉을 칠을 한 소용돌이 혹은 파도 문양의 토기, 그리고 가장 위층에서는 표면에 붉은 칠을 한 토기가 출토되었다.(도4) 발굴 현장에서는 두 다리를 곧게 펴서 묻은 시체의 머리는 동쪽으로, 얼굴은 남쪽으로 향하게 하였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것은 죽은 이의 환생을 바라는 매장법일 것이다. 붉은 칠을 한 소용돌이 문양의 토기를 관棺의 형태로 시신의 주위를 두른 아마도 어머니의 자궁을 상징하는 것으로 보인다. 죽은 이가 환생하기 위해서는 다시 어머니의 자궁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고 믿었던 것 같다. 중국이나 인도 문화권과는 전혀 다른 태국 족 고유의 형태와 색과 문양의 세계를 실현하였다. 그러나 이와 같이 아름다운 채색 토기를 만들어낸 반치앙 문화는 어느 날 홀연히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얼굴 뱀 무늬 항아리
인드라자트라 의식의 주신主神인 바이라브에게 바치는 탁주(코라투)를 담는 단지이다. 단지에는 바이라브 신이 높은 부조로 새겨져 있다. 술은 쌀(츠아누르)과 옥수수를 발효시켜 만든다. 이 날, 사람들은 하늘에서 카트만두로 내려온 바이라브 신에게 열렬한 기도를 올린다. 축제에는 쿠마리, 가네샤, 바이라브 신을 태운 세 대의 화려한 수레가 마을을 순행한다. 밤이 되면 수레의 휘장을 걷고, 놋쇠으로 만든 바이라브 신의 상에 예배를 올리는데, 예배를 마친 이는 상 안에 넣어둔 술에 가는 파이프를 꽂아 웃음을 띄우며 빨아 마신다. (도5)
틀로 찍어 만든 불상塼佛
서북방에서 이동해온 버마 족은, 이라와디 강 유역에 펼쳐진 비옥한 파간 평원에 정착하였다. 토착민 퓨 족이나 몬 족을 평정한 후, 9~10세기에 걸쳐 도성을 구축하였다. 그들은 몬 족의 불교를 받아들이고 많은 불탑을 세워, ‘건사建寺왕조’ 라고 불리기도 하였다. 기원전 3세기에 동남아시아를 장악한 몬 족은 일찍부터 이 지역에 불교를 받아들인 선구자였다. 같은 시기에 퓨 족은 마인모에 수도를 정하였다. 고유의 퓨 문자를 사용하였으며, 민족 신앙으로 낫(영혼)을 숭배하였다. 기원전 1세기~기원후 5세기에는 베이타노에 수도를 정하고, 불교 대신에 비슈누 신을 숭배하면서 인도의 산치 대탑과 닮은 석탑을 조영하였다. 더 나아가 중국 윈난 성에서 슈에리 강을 따라 내려와 염호鹽湖의 주변 하링에 도시를 세웠다. 또한 프롬으로 가는 도중인 모자 마을의 시리킷타에는 불교를 기반으로 한 나라를, 그리고 남 프롬에는 벽돌을 쌓아 올린 요새를 중심으로 한 소국을 세웠다. 그들은 힌두교의 신들이나 불보살을 깊이 공경하고, 죽은 이는 다비한 후에 뼈단지骨壺, 아요오에 모셨다. 또한 사리탑, 법라구法螺具, 금강저, 일월 등의 모양을 한 화폐가 발견되는 것으로 보아 선진적인 국가 운영 형태를 짐작해 볼 수 있다. 불교의 전래는 인도의 아쇼카 왕의 시대에 파견된 포교승 우츠타라와 소루에 의한 것으로 전해진다.
파간의 먀제디 비문(1112년)에는 버마, 몬, 퓨, 팔리 어로 「챤 시트 카 왕과 비의 아들 자크라마는, 부왕의 병을 낫게 하기 위하여 이 파고다에 금을 기부하였다」고 적혀있는데, 이는 미얀마에서 가장 오래된 문자 자료이다. 퓨 족의 황태자 야자크라마는, 9세기 초 중국의 당 왕조에 진공하기 위하여, 수금竪琴 등과 같은 전통 악기를 가지고 장안을 방문한 적이 있다. 장안에서 황태자는 「우리의 수도는 맑은 물이 흐르고 새들이 지저귀는 아름다운 에야와디 강변에 위치한다」고 자랑스럽게 연주하였다고 한다. 이 연주를 들은 당의 시인 백락천白樂天은 「퓨의 악樂」이라 칭하며 미얀마의 화려한 불교 조형의 아름다움을 칭찬하였다. 그리고 왕국의 번영과 자연, 그리고 사랑 이야기 등을 시로 읊어 예찬하였다. 이 연주는 미얀마에서 포우에(축제)나 10월에 샨 주州의 인레이 호수에서 카라우이, 즉 가릉빈가迦陵頻伽, 혹은 極樂鳥와 같은 전설 속의 새 모양을 한 커다란 배를 타고 나아가는 축제 등에서도 들을 수 있다. 이후 중국의 남조南詔 왕국의 공격에 의해 멸망하였다. 버마 족은 퓨 족이 쇠퇴한 틈을 타 비옥한 파간의 넓은 지역을 차지하고 수도를 세우게 되었다. 현재 퓨 족의 귀중한 불교 조형 자료는 슈리크쉐트라 유적자료관이나 국립파간고고학박물관에 수장되어 있다. 이들이야말로 파간 이전의 ‘미얀마 불교조형문화사’의 귀중한 자료라 할 수 있다.
일부 내용이 생략됩니다. 월간도예 2011.01월호를 참조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