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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0.12월호 | 뉴스단신 ]

현대미술의 7가지 키워드와 함께 떠나는 방창현의 세계도자기행(9)
  • 편집부
  • 등록 2011-02-10 10:16:04
  • 수정 2011-02-10 12:0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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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현대미술의 중요한 키워드인 숭고the sublime, 몸body, 미니멀리즘minimalism, 물성materiality, 서사narrative, 개념미술conceptual art, 팝아트pop art를 중심으로 본 현대도예 비평의 글이다. 하지만, 형식면에서는 기행문적 수필의 형식을 빌어 독자들이 현대 도예 담론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쓰여졌다. 한국의 현대도예가 오랜 동면의 시기를 지나 이제 찬란했던 옛 영화를 위한 용트림을 하는 이 시기에 한국 현대도예의 미래 비젼과 현재의 성찰을 제시하는 글이 될 것이다.

 

 

몸. 모옴. ㅁ
아홉 번째 작가: 크리스티나 웨스트 Christina West

 

 ‘몸은 우리가 세계에 다가서는 방식이다.’
-메를로 퐁티Maurice Merleau-Ponty1) -


피곤한 몸을 이끌고 저녁 식사도 거른 채 스페인어로 된 간판이 붙은 어느 여관에 도착했다. 무표정한 주인아주머니를 따라 작은 통로를 지나자, 작고 미묘한 그리고 반복적인 어느 남녀의 신음소리가 내 신경을 곧추세운다. 아주머니는 정확히 그 소리가 나는 옆방으로 나를 안내한다.
빈방 속에 혼자 덩그러니 남겨진 나는 외부 세계와 철저히 단절되어 있었고, 침대에 누워 다시 그 소리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내 이름과 나의 존재감이 드러나지 않은 낯선 곳의 여행은 나에게 자유로움을 넘어 내 안에 유리되어 있던 본능을 자극시킨다. 나는 내 몸에 먹물처럼 풀어지는 시원始原의 감각에 진저리를 친다. 모든 이성이 잠든 사이에 선연히 피어오르는 내 몸의 감각에 다시 집중한다. 순간, 나의 이성과 나의 언어는 몸의 은밀한 속삭임에 속수무책으로 무너진다. 내 몸을 이끌고 이곳까지 온 나의 의식과 이성은 도대체 어디로 간 것일까? 나는 왜 내가 아닌 곳에서 생각하고, 내가 생각하지 하지 않는 곳에서 존재하는 것일까? 2)
인터넷과 테크놀로지의 발달로 이젠 남의 몸을 훔쳐보는 일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이 모든 행위는 누군가가 보지 않은 은밀한 곳에서 발생한다. 이것은 다른 동물들과 구별되는 행위이다. 몸에 관해서 우리는 동물들과 다른 생각을 품고 있는 것이다. 동물들은 몸을 해방과 자유의 도구로 이용하지만, 인간의 몸은 이성과 도덕, 그리고 종교라는 형이상학적이고, 초월적인 가치의 동굴감옥에서 사육되어진, 세상에 감히 들어낼 수 없는 낯선 존재자였다. 그래서 인간의 역사는 이 낯선 존재자를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인간의 몸은 한낱 온갖 질병의 온상이었고, 입에 담기 힘든 욕망의 근원지였으며, 의식의 기대에 미칠 수 없는 무기력한 세포덩어리였다.” 하지만 수세기 동안 동굴 안에서 은폐되었던 인간의 몸이 세상 밖으로 나온 것은 20세기 지성사에서 이성주의를 부정하는 포스트모더니즘postmodernism의 출현과 관계있다.
포스트모더니즘은 정주민의 이성적 사유방식과 남근男根 중심의 행동방식을 철저히 해체시켰다. 이성이 문명을 진보시켰다는 믿음에 반기를 들고, 반문명적인 욕망과 광기를 역사의 전면에 내세웠고, 그 중심에는 인간의 ‘몸’이 있었다. 인간의 몸에는 수백만 년에 이르는 우주진화의 모든 흔적이 담겨져 있었다. 그 광활한 영토의 기억과 영겁의 시간들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인간의 몸은 우리의 이성과 영혼의 영원한 타자이자, 한 번도 밟아보지 못한 원시림原始林, virgin forest 이였다. 포스트모더니즘postmodernism의 철학자들은 이 원시림을 탐험한 것이다. 이 원시림에서 발견한 것은 이성을 인간의 역사의 중심에 세웠던 정주민들의 사유방식이 억압과 착취의 메카니즘mechanism을 생산했고, 인간을 자연과 멀어지게 만들었다는 새로운 사실이었다. 그들은 몸의 역사는 곧 인류의 역사라고 생각했으며, 우리들의 몸은 그 안에 광기와 폭력의 슬픈 역사를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인간의 이성에 토대를 둔 문명이 야기한 상처를 고스란히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다.3) 하지만 인간의 망각의 힘은 대단한 것이어서 아우슈비츠4) 이후에도 수많은 서정 시인들이 등장한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이다.5) 이성은 끊임없이 스스로를 망각하고, 타자(몸의 욕망)를 은폐하고, 그리고 아무 일 없다는 듯이 젠체한다. 몸의 슬픈 역사는 이렇게 해서 시작되었다.
인간의 몸은 끊임없이 이동하고, 욕망하고, 부유한다. 하지만, 우리의 영혼은 대부분 몸의 행위를 인식하지 못하고, 인간의 이성은 몸의 욕망을 인정하지 못한다. 가장 가까이에 있지만, 가장 먼 대상. 그러나 우리 몸이 생명을 다할 때, 비로소 우린 우리의 몸을 감각적으로 인식하고 받아들인다. 피고름이 피어나고, 세균이 심장을 갈아먹는 소리를 그때서야 듣게 된다. 그 순간, 우린 우리 몸의 광활한 영토와 마주친다.

크리스티나 웨스트Christina West는 타인을 혹은 타인의 몸을 ‘응시stare’하는 일에서 존재의 살아있음을 느낀다. 응시는 정주민의 훈육방식에 있어서 무례함이나 비이성적인 행동으로 금기시되는 행동이었지만, 작가는 이 응시야 말로 나를 벗어난 외부 세계와의 진정한 관계를 이끌 수 있는 소통의 장으로 간주한다. 작가의 타인의 응시는 ‘관음증’과 ‘호기심’ 사이를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며 관객들을 우리들에게 친숙하지만 낯선 몸의 세계로 인도한다. 우리들이 항상 지니고 있는 몸은 타인의 몸과 근본적으로 비슷한 형상을 하고 있지만, 응시를 통해서 본 타인의 몸은 신비롭고, 고혹적이고, 때론 모호함을 유발한다.
크리스티나 웨스트Christina West의 작품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작품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모두 광기와 욕망에 사로잡힌 기이한 행동에 전념하고 있음을 쉽게 알 수 있다. 은색 왕관을 쓴 여자(남자의 얼굴을 하고 있음)가 익명의 다른 여자의 목을 조르는 모습, 몸에서 흘러나오는 하얀 액체를 멀거니 바라보는 초로의 대머리 아저씨의 모습, 일직선의 하얀색 띠가 의자와 여인, 그리고 여인 뒤에 있는 의자에 일률적으로 드리워진 모습, 그리고 붉은 색의 발과 파란색의 몸을 지닌 여자가 벽에 기대어 알 수 없는 공허한 시선으로 천장을 바라보는 모습, 은색 상자 위에 서서 은색 의자를 몰래 응시하는 모습. 이 모든 행동들은 우리가 일상에서 응시할 수 있는 타인의 보편적인 모습들은 아니다. 작가의 관심은 우리가 이성으로 통제하고 관리할 수 있는 영역의 밖에 존재하는 인간의 이성이 은폐하려는 몸의 욕망과 광기만이 오롯이 존재하는 곳이다.
그리고 크리스티나 웨스트Christina West의 작품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거의 나체의 형상을 하고 있다. 이성과 문명의 산물인 거추장스러운 인간의 옷은 도대체 언제부터 생겨난 것일까라고 반문하듯이 작품 속의 인물들은 은밀한 속살들을 관객들에게 그대로 노출시킨다. 더욱더 주목할 부분은 작품 속의 인물들도 하나같이 무언가를 응시하고 있다는 점이다. 관객들이 전시장에 들어오는 순간 그 대상은 관객이 될 수도 있다. 즉, 관객의 응시와 작품 속의 인물들의 응시가 서로 맞물려 있는 이중구조이다. 크리스티나 웨스트는 이 이중응시를 통해 ‘봄seeing’만을 지닌 주체의 응시를 ‘보임being seen’을 지닌 새로운 주체로 거듭나게 만든다. 이 이중응시의 개념은 현대 구상조각의 진부한 서사구조를 한번에 전복시키면서 크리스티나 웨스트의 뫼비우스적 사유를 현대도자조각의 새로운 담론으로 부각시킨다.
크리스티나 웨스트Christina West는 이중응시를 통해서 주체와 객체의 경계를 해체시키고, 주체가 객체를 하나의 실체로 객관적으로 지각한다는 고전적 명제를 부정한다.6) 객체에 머물러 있는 타인의 몸seeing과 우리 자신의 몸being seen이 동시에 자각되는 이 현상학적인 경험은 곧 주체의 소멸로 이어지고, 순간 우린 타자로 머물러있던 우리 몸의 광활한 영토와 마주친다. ‘나는 전적으로 몸이며, 그밖에는 아무것도 아니다’라는 니체Friedrich Wilhelm Nietzsche, 1844~1900의 언설을 절절히 체득하는 순간인 것이다. 
크리스티나 웨스트Christina West의 최근의 작품들은 인간의 몸이 마네킹처럼 하나의 분절된 사물화가 되어가는 그로테스크 리얼리즘grotesque realism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 몸에 대한 담론이 20세기 서양 지성사에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음은 글의 서두에서 언급한 바 있지만, 20세기 후반 이후의 몸에 대한 미술사적 의미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지니고 있다. 크리스티나 웨스트의 최근의 작품에서는 데카르트적 형이상학이 지니는 위선적인 이성의 탈출구로서의 몸은 좀 더 과격하고 노골적인 성의 표현이나 분절된 신체의 그로테스크함을 추구한다. 명분 없는 전쟁7)으로 거듭된 인간 이성에 대한 배반과 절망, 그래서 플라톤적 이데아를 이제는 영원히 추구할 수 없다는 절박한 현실은 예술가들의 정신성을 해리상태로 몰고 갔음에 틀림없다. 물론 이런 거시론적 이슈이외에도, 정상인과 비정상인들의 구별을 해체시킨 후구구조주의자들의 담론은 돌연변이적인 개인의 욕망의 주체성이 사회적으로 소통이 되고, 더 나아가 탐미적인 섹슈얼리티나 그로테스크 리얼리즘으로 승화시킨 면도 간과 할 수 없다. 개인적 욕망의 주체성의 강조는 획일화 되어가는 인간 이성에 대한 저항을 자칫 탐미적 쾌락주의로 빠지게 만드는 오이디푸스적 Oidipu? 위험성도 내포하고 있다.

 

일부 내용이 생략됩니다. 월간도예 2010.12월호를 참조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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