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원영 자유기고가
바람불고 비 오더니 창밖이 환해집니다
바람은 멎고 비도 어느새 그쳤습니다
걸어 온 길, 앞으로 가야할 길,
가야 할 길이 멀어 어깨가 무거웠습니다
바람불고 하늘이 어둡더니 햇살이 비칩니다
어둠은 가고 어느 사이 산새가 지저귑니다
걸어 온 길, 앞으로 가야할 길
온 길 보다 갈 길이 적음을 이제야 알 것 같습니다
내가 돌려야 물레는 돌고, 내가 지펴야 불은 타오르지요
그래서 항상 주인은 나라고 생각했습니다
걸어 온 길 삼십 년, 무엇이든 해낼 수 있다
자신감으로 걸어 온 길, 그래서 장작만을 고집했구요
온 길 보다는 갈 길이 적게 남았음을 이제야 압니다
내가 흙이 되어야 하고, 내가 불이 되어야 함을 이제야 느낍니다
그들이 오히려 나의 주인이었음을 이제야 느낍니다
흙이 있고, 불이 있어야 도공이 있음을 이제야 압니다
석봉 한도현은 도자예술가가 아니다. 흔히 이야기하는 작가도 아니다. 그 앞에서 ‘작가님......’ 운운하면 그는 몹시 낯설어 한다. 그는 한낱 도공일 뿐이다. 어쩌면 그의 말대로 그는 오로지 고집불통의 쟁이일 뿐인지도 모른다. 평범한 대학생이었던 그가 본격적인 도공의 길을 걷게 된 것도 우연이었다고 밖에 할 수 없다. 동해도예를 운영하는 둘째형의 일을 도와주다가 우연한 기회에 스승인 우당 한명성을 만나게 되고, 그를 눈여겨보았던 스승의 말 한 마디에 대학을 그만두고 본격적으로 도공의 길을 걷게 된 그. 그는 학교를 그만두고 도공의 길에 들어서면서도 아무런 주저함이 없었다고 한다. 흙을 만지고, 물레는 차는 일이 그저 좋기만 했다고 한다. 우당 선생의 문하로 들어가면서도 장차 유명한 도예가가 되겠다거나, 불후의 작품을 만들어보겠다거나 하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더란다. 언제든 물레를 차고, 흙을 빚어 그릇을 만들 수 있다는 생각에 마음만 급해지더란다.
도공의 길은 생각처럼 순탄한 것이 아니었다. 우당 한명성 선생을 만나기 전 도예를 배우겠다며 고교를 졸업하자마자 들어간 토정 홍재표 선생의 문하에서 맨 처음 그가 한 일은 나무를 자르고 장작을 패는 것이었다. 장작을 패면서도 그는 종종 스승의 꾸중을 들어야 했다. 무조건 패는 것이 아니라 쓰임에 맞는 장작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된 것도 스승의 꾸중을 통해서였다. 장작을 거친 후 그에게 주어진 일은 흙을 거르고 이기는 일이었다. 덩어리를 깨고, 부수고, 체를 치고, 앙금을 앉히고...... 하지만 앙금을 걷어내 맨발로 흙을 이길 때는 그렇게 행복할 수가 없었다. 발바닥으로 전해오는 흙의 부드러움이 한창시절 그의 가슴을 진정시켜 주었다. 힘겨움과 답답함에 몇 번이나 스승의 품을 박차고 나올 생각도 했었지만 흙의 촉감을 느낄 때마다 그런 생각들은 소리없이 스러지곤 했다. 스승의 허락을 겨우 얻어 물레를 차게 되었을 때의 기분은 말 그대로 하늘을 날 것 같았고, 눈물이 핑 돌기까지 했다.
그는 지금도 우직하게 전통 장작가마만 고집한다. 몇날 며칠 밤새워가며 가마를 재우고, 불을 지피는 과정을 거쳐 작품을 꺼낼 때도 그는 자그마한 흠집 하나 허용하지 않는다. 흠집은커녕 색상이나 형태가 조금만 아니다 싶어도 그 자리에서 깨버린다. 그래서 그의 가마 옆에는 커다란 도자기 무덤이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그에게는 철학이 없다. 말에도 미사여구가 없다. 꾸밈이 없는 진솔함과 도공으로서의 자존심만 있을 뿐이다. 그에게 타협이란 말은 사전에서 낮잠을 자는 역할밖에는 못하는 그런 말일뿐이다. 그의 지론은 오로지 하나, 자신의 작품을 소장하게 되는 사람이 그 작품에 대한 애착을 느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도공의 눈에 들어오지 않는 작품이 다른 사람에게 기쁨을 줄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도공의 양심이라고 했다. 눈가림이나 얄팍한 상술은 도공의 혼을 파먹는 아주 못된 기생충이라는 것이다. 그를 좋아한다는 한 사람은 그의 작품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가엾다는 생각이 든다고 한다. 맑음이 있고, 깊음이 있고 때로는 넘칠 것 같은 힘과 우직함이 살아있는 그의 작품 속에서 그는 도공의 애끊는 듯한 혼이 손짓을 하는 것 같아 가슴이 아프다고 한다.
석봉 한도현은 고집과 우직함으로 도자기를 빚어낸다. 거칠고 힘이 넘칠 것 같으면서도 절제와 여백이 있어 보는 이를 묘하게 끌어안는다. 조선 막사발을 재현한 그의 이도다완은 거침없는 굵은 선과 힘을 자랑한다. 형태와 요변을 흉내내는 것이 아니라 말 그대로 재현에 온 정성을 기울인다. 이도다완에 식견이 있다는 인사들이 그의 이도다완에 대해 침이 마르도록 칭찬을 해도 그는 아직은 모자란다며 한 점도 판매를 하지 않았다고 한다. 일본에서도 전시회에 출품된 그의 작품을 보고 이도다완을 구입하겠다며 여러 사람이 찾아 왔었지만 모두 거절했다고 한다. 아직 부족하다는 이유에서였다.
석봉은 남들보다는 좀 늦은 스물 여섯의 나이에 스승인 우당 한명성의 권유로 본격적으로 도공의 길로 들어섰다. 고교 졸업후 토정 홍재표 선생의 문하에서 기초를 익혔으나 배움에 대한 미련이 남아 대학에 진학을 했다. 하지만 대학생활이 그의 도자기에 대한 열정을 식혀주지는 못했다. 그래서 그는 틈나는 대로 도예공방을 하는 둘째형을 도와 도자기와의 인연을 이어갔다.
일부 내용이 생략됩니다. 월간도예 2010.06월호를 참조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