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연재는 현대미술의 중요한 키워드인 숭고the sublime, 몸body, 미니멀리즘minimalism, 물성materiality, 서사narrative, 개념미술conceptual art, 팝아트pop art를 중심으로 본 현대도예에 관한 글이다. 하지만, 형식면에서는 기행문적 수필의 형식을 빌어 독자들이 현대 도예 담론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쓰여 졌다. 한국의 현대도예가 오랜 동면의 시기를 지나 이제 찬란했던 옛 영화를 위한 용트림을 하는 이 시기에 한국 현대도예의 미래의 비젼과 현재의 성찰을 제시하는 기회가 될 것이다.
미니멀리즘Minimalism이 대세다. 최근 디자인에서 가장 흔히 볼 수 있는 용어는 ‘미니멀리즘Minimalism’이란 단어일 것이다. 현대 건축이나 테이블웨어 디자인tableware design, 최근 출시된 아이폰과 노트북 디자인에서도 이 용어는 현대인의 지각 속에서 이미 가장 매력적인 코드로 자리잡고 있다. 미국에서 시작되어 한 시기를 풍미했던 미술사조가 새로운 시대와 지역을 넘어 보편적 미의 정석으로 자리매김한 이유는 무엇일까? 나는 허드슨 강이 내려다보이는 뉴욕의 디아 비콘 뮤지엄Dia: Beacon Museum에서 미니멀리즘 조각가 리챠드 세라Richard Serra의 거상조각monumental sculpture을 둘러보고, 지금은 미국의 대표적인 도예 갤러리인 가드클락 갤러리Garth Clark Gallery로 가고 있다. 네덜란드에서 온 도예가 우터 담Wouter Dam의 전시를 보러가기 위해서다. 리차드 세라Richard Serra의 최근 작품이 극도로 절제된 유기적 미니멀리즘Organic Minimalism을 추구한다면, 우터담Wouter Dam의 작품은 유기적 구성과 즉흥성이 더욱 강조 되어 있다.
모더니즘의 반환영주의의 산물인 미니멀리즘은 아르데코Art Deco의 장식성과 표현주의 작품에서 보여지는 서정성과 서사성을 철저히 배제시키고, 작품자체의 현전성presence을 가장 강조했다. 초기의 미니멀리즘 디자인은 일본의 전통적인 디자인과 건축물에서 영향을 받았지만, 건축가인 루드비히 미에스 반 데 로헤Ludwig Mies van der Rohe의 “적은 것이 많은 것Less is more”과 디자이너인 디터 램스Dieter Rams의 “적게, 그러나 더 낫게Less but Better”라는 미니멀리즘의 미학을 기저로 ‘단순성’과 기하학적인 유니트의 ‘반복성’을 최고의 미적 대상으로 간주했다.
미국의 미니멀리즘 조각가들은 구리나 철판과 같은 공장에서 대량생산된 공업자재를 직접 작품으로 이용했지만, 일본을 중심으로 활동했던 ‘모노하Monoha, 物體波’라고 불린 동양적 미니멀리즘 아티스들은 돌이나 나무와 같은 자연적인 재료를 이용하여 공간, 위치, 상황, 관계를 드러내는 사물의 인과과정과 존재의 상관성에 관심을 가졌다. 미국의 선구적인 미니멀리스트 도널드 주드Donald Judd가 주장한 “존재한다는 측면에서, 세상의 사물이 동일하다”는 개념은 전통적인 예술이 가지고 있는 사물의 재현적representational 요소을 제거하고, 사물의 근원으로 도달하려는 그의 혁신적인 사상을 보여준다.
미니멀리즘 회화는 화면에 나타나는 구상적 일루젼concrete illusion을 배격하고, 작은 유니트로 이루어진 반복성과 기하학적인 규칙성을 중요시 했지만, 욕망을 정화시킨 시원의 순수성을 모노톤mono tone의 숭고미로 표현하는 ‘애그니스 마틴Agnes Martin’에서 유기적 미니멀리즘을 추구하는 ‘브라이스 마든Brice Marden’에 이르기까지 매우 다양하다.
미니멀리즘Minimalism은 작가의 개입을 최소화시키고, 나머지 공간을 관객을 위한 여백의 생성공간으로 자율적 텍스트를 강조한다. 작품 속 혹은 작품 자체가 지시하는 어떤 대상이나 이미지를 지움으로써 작품 자체가 하나의 텅 빈 기호적 사물이 된다. 이 사물(작품)은 그것을 둘러싸고 있는 공간과의 현상학적인 간극을 최소화시키면서 자신의 현전성을 나타내지만, 하나의 사물로 환원reduction되는 과정 속에서 작품은 부존으로 치닫는다. ‘부존하는 현전’, 그 어떤 욕망의 개입도 존재하지 않는 이 무위無爲의 개념은 노자의 사상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원래 ‘무無’란 실제로는 있지만 없는 듯함實有而似無을 나타낸다. 이 ‘비어있음’의 공간으로 들어온 관객들은 자신만의 텍스트로 작품을 다시 만들어간다. 이것이 미니멀리즘이 새로운 시대를 넘어서고, 토착적인 지역성을 아우를 수 있는 가장 중요한 동인動因이 된다. 롤랑바르트Roland Barthes, 1915-1980, 프랑스의 구조주의 사상가, 문학가가 ‘저자(작가)의 죽음’을 선언 한 이후, 미니멀리즘은 한층 더 다양한 양태로 변형되어 나타난다.
가드클락 갤러리Garth Clark Gallery에 들어서자 전시대 위에 놓여진 우터 담Wouter Dam의 단색 조각들은 ‘무위無爲의 미학’의 절정을 보여준다. 모노크롬monochrome의 현전성은 곧 사물화 되어 여백을 생성하고, 생성된 여백은 관객들을 위한 무한한 사유의 공간으로 전이된다. 작품의 존재론적 욕망과 사물화의 부존 사이의 절제된 균형은 작가가 작품을 이끌어가는 전체적인 유기적 관계망이고, 텍스트는 그 안에서 차연差延, Diff럕ance, 프랑스 해체주의 철학자 자크 데리다가 만든 용어이다. 이것은 지연시키다(to defer)와 차이짓다(to differ) 두가지 말을 결합해 만든 것이며, 언어가 말을 전달하지 못하고 계속 지연시키는 상태에 있다는 것을 지칭하는 뜻으로 사용된다.을 생성하며 관객들을 존재의 시원始原을 향한 낯선 공간으로 끌어들인다.
파시스트적인 속도로 질주하는 산업사회의 뒤안길에 놓여진 인간의 생태학적 존재성은 이 공간에서 신화적 아우라aura와 대면한다. 세상의 존재하는 모든 생명의 현존성이 갖는 불안과 고통과 욕망은 이 신화적 아우라를 더욱 활성화시킨다. 다시 말하면, 삶이 더욱 불안에 노출될수록, 존재론적 취약성에 더욱 직면할수록 이 공간의 신화성은 더욱 부각된다는 것이다. 이 비움의 공간에서 만나는 것은 채움을 위한 욕망의 공간이 아니라, 욕망을 해체하고 무無로 환원되는 하나의 선禪적인 공간이고, 후기 현대미학의 토대가 되는 중요한 현상학적 공간이다. 세계적인 전위예술가인 백남준과 존 케이지John Cage도 자신의 반예술의 이론적 토대를 바로 이 공간에서 보았음에 틀림없다. 이시기 미국에서 활동하던 전위 예술가들이 불교와 동양철학에 매진했던 이유도 바로 이 무無의 공간에서 끊없는 생성과 창조의 힘을 발견한 것이다.
비어진 공간에서 생성된 신화적 아우라Aura는 개별자의 사고와 지역적인 사고를 아우르고, 서구의 형이상학으로만 해석할 수 없는 동양의 반자론적反者論的 세계관을 드러낸다. 노자의 ‘天下萬物生於有, 有生於無’이란 말이 전하듯이 작품의 현전성有은 부존無이라는 살아 숨쉬는 무한의 공간으로 전이 되고, 이 부존無은 작품의 현존함有을 지탱하는 생성의 원리가 된다. 현전과 부존이라는 서로 대립되는 현상학적인 모순을 절묘한 조화로 이끌어 내는 우터 담Wouter Dam의 능력은 가히 압권이었다.
우터 담Wouter Dam은 원래 물레를 사용해서 작은 항아리를 만드는 전형적인 도예가였다. 항아리의 굽을 떼어내고 몸통을 자른 뒤에 서로 다른 슬랩Slab을 붙여서 처음의 항아리의 형태를 전혀 알아 볼 수 없는 추상적이고 유기적인 형태로 변화된 작품들은 존재의 시원에 대한 희미한 기억과 암시를 나타낸다. 이 지점에서 작가는 더 이상 말을 하지 않고 작은 입자처럼 유유히 사라진다. 작가가 사라지고 난 뒤에 남겨진 것은 텅빈 텍스트와 관객들이다. 이 텍스트를 채우는 것은 관객들의 몫이다.
미니멀리즘은 왜 재현을 통해서 작가의 욕망을 드러내지 않는 것일까? 작가의 자리를 관객들에게 내어주고 그들은 무엇을 추구하려는 것일까? 몸을 세우고, 자신의 능력과 권세를 만천하에 알리는 것은 동서고금을 통해 인지상정人之常情이 아니었던가. 남들과의 우월한 차이를 만듦으로써 자신의 존재를 피력하던 작가들을 뒤로하고, 왜 미니멀리스트들은 홀연히 자신의 존재를 숨기고 사라진 것일까?
미니멀리즘이 태동한 시대는 공교롭게도 팝아트와 함께 제2세대 아방가르드를 형성하던 후기 자본주의의 대중문화들이 득세하던 시대였다.
일부 내용이 생략됩니다. 월간도예 2010.06월호를 참조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