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영목 서울대학교 서양화과 교수
무릇, 서구 모더니즘 미술의 발전과 변화를 줄곧 회화가 주도해 왔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특히, 재현representation을 벗어나 추상abstract으로 확대, 발전한 회화의 움직임은 곧바로 미술의 여타 영역으로 퍼져 나갔다. 예를 들어, 회화적 추상성의 파급효과가 기타 미술의 장르에 끼친 영향은, 심지어 건축도 포함해 바우하우스Bauhaus의 모토motto와 그 교육적 결과물들을 들여다보면 쉽게 알아차릴 수 있다. 재현의 정치, 사회적 패러다임을 벗어난 추상은 상대적으로 ‘미술의 유토피아적 순수성’을 지향하는 최상의 형식style으로 자리를 잡았었다.
한편, 추상은 각 매체 간의 소통의 물꼬를 터줬다. 이러한 성향은 ‘회화적 조각’-피카소Picasso의 「기타」- 혹은 ‘조각적 회화’-타틀린V. Tatlin의 「모서리 공간 부조」- 또는, ‘건축적 조각’-슈비터즈K. Schwitters의 「Merzbau」- 그리고, ‘회화적 공예’라 할 수 있는 리트펠트G. Rietveld의 「의자」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게 나타났다. 물론, 이러한 소통의 물꼬가 공간에 관한 기존 개념을 뒤흔들어 놓았다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김정석의 유리공예는 모더니즘의 측면에서 위의 두 가지 태도에 그 뿌리가 있다. 즉, 첫째로, 유리를 통한 추상의 순수한 장식성을 추구한다면 그것은 다분히 미학적이자 정신적인 측면에서의 모더니즘과 그 맥을 같이 한다. 둘째로, 공예의 태생적인 기능성과 실용성을 제외한, 순수한 장식성의 측면에서 김정석은 분명하게 평면적인, 아울러 회화적인 추상성에 힘입은 두 매체간의 결합을 시도했다. 하지만 이 결합들이 공간에 대한 보다 적극적인 태도로서의 장식성에 관여함으로써 빛과 함께 그 투명함을 뽐내는 아름다운 새로움으로 보는 이를 매료시킨다.
유리의 투명함은 이미 20세기 초반의 모더니스트들에게 꿈의 매체였다. 그것은 물질Material로서 유일하게 ‘순수’의 대명사가 될 수 있었고, 더 나아가 사회주의적 유토피아가 꿈꾸는 꿈의 건축재료로 돌과 나무와 금속을 대체해나가는 실질적이자 상징적인 물질로서, 자연의 ‘겉과 안’이 통하는 혹은, 인간의 ‘내면과 외부’가 소통하는 메타포의 역할을 톡톡히 수행해왔다. 이것 모두가 ‘투명함’ 때문이다.
어쩌면, 유리의 이 투명함이 회화를 포함한 기존 미술의 매체적 속성과 그 한계를 뛰어 넘을 대안으로 생각했을 수도 있다. 물론, 빛을 받아야 그 투명함이 존재하고, 이미 그것을 응용한 스테인드 글래스Stained-glass의 전통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 투명함이 자아내는 시각적인 분위기를 미술의 여느 기존 매체가 따라갈 수 있었을까?
보는 이마다 그 느낌과 견해가 다르겠지만 회화의 경우와 비교하면 그 특성은 더욱 드러난다. 두 매체간의 특성상 서로 닮은 점도 많지만 궁극적인 차이는 결국 ‘흡수성’의 문제이다. 유리는 색과 색이 서로 중첩될 수는 있을지언정 서로가 서로를 흡수할 수는 없다. 그래서 투명한 것이다. 때문에, 회화의 미묘한 ‘번짐’처럼, 색과 색 간의 ‘투습’의 효과나 그 경계 사이의 애매모호함이 없으므로 투명함이 더욱 돋보이는 것이다. 이것이 유리의 장점이다. 유리로도 중간색을 만들 수는 있다. 가령, 파랑과 노랑을 중첩하여 불로 녹이면 초록이 나올 수 있다. 그러나 제작자가 어떤 느낌의 초록을 그 배합의 비율로 어느 정도까지는 예견하더라도 그것의 정확한 결과는 그야말로 불의 장난이다. 이런 측면에서 유리공예는 공예일 수밖에 없다. 또한 이런 측면에서 유리공예는 추상과 어울린다. 즉 ‘우연’을 기대하는 회화적 추상성이 불로 녹이는 과정에서 뜻밖의 결과로 ‘창조’될 수도 있으므로.
일부 내용이 생략됩니다. 월간도예 2010.07월호를 참조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