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명회 도자전 2002. 3. 6~3. 12 한국공예문화진흥원(5F)
여백과의 대화 - 구명회 근작에 대하여
글/윤진섭 미술평론가, 호남대 교수
구명회는 눈이 흩날리는 광경을 바라보며 그 속에서 ‘공간의 무한성’과 ‘존재의 유한함’을 느꼈다고 한다. 이 예기치 못한 미적 경험은 그의 뇌리에 강렬한 인상으로 남아 훗날 흑과 백(네거티브), 백과 흑(포지티브)의 창작 컨셉트를 낳게 된다. 검은 바탕에 서체적 드로잉을 연상시키는 흰색 그림과 흰색 바탕에 검정색 그림이 있는 도자기를 제작하기에 이른 것이다. 한폭의 문인화를 연상시키는 작품은 흙빛을 머금은 백색을 띰으로써 필획 사이로 은은히 번져나오는 흙의 원초적인 느낌을 잘 살려내고 있다.
붓 대용으로 수수대, 지푸라기등을 사용하여 갈필의 거친느낌을 잘 표현하고 있는데 이러한 표현기법은 문기의 표출이 중시되는 문인화의 방법론과 매우 흡사한 것이다. 도자회화로 부를 수 있는 이 특이한 형태의 작품은 도자기 특유의 삼차원적 볼륨감이 결여된 반면, 평평한 신체에 그림을 그려 넣을 수 있도록 고안되어 있다. 그의 자기 형태는 단순한 장식 욕구보다는 애초에 그림을 그려 넣고자한 작가의 의지가 반영된 결과물이다.
마치 캔버스처럼 옆구리가 좋은 반면 전면과 후면은 넓은 형태는 도자기를 하나의 화면으로 여긴 아이디어의 소산인 것이다. 우리의 전통 자기에서 보이는 무명씨의 그림들이 그 성격상 장식성이 두드러진다고 한다면, 그의 자기에 나타나고 있는 그림은 작가의 강한 표현의지가 담긴 창작물이다. 물론 과거 무명의 도공들이 그린 전통자기의 그림들 또한 예술성 내지 완상을 위한 심미성을 지니고 있는 것은 사실이나, 구명회의 도자기는 회화의 문제를 보다 우선시하고 있다는 점에 그 차이가 있다.
즉 회화적 발상이 작품의 형태를 결정하는 한 요인이 되고 있는 것이다. 구명회는 작품의 형태를 자연에서 얻고 있다. 그 중에서도 특히 산은 그에게 있어서 영감의 원천이다. 올망졸망하면서도 때론 웅장한 한국의 산야는 그에게 풍부한 아이디어를 제공한다. 작가 자신의 말에 의하면 ‘때론 슬프고, 때론 격정적인 산의 리듬들’을 형상화한 것이 그의 도자기들이다. 그의 도자기 형태는 한국의 산야처럼 푸근하며, 그 속에 담긴 그림들은 한폭의 문인화를 보는 것처럼 편안한 느낌을 준다. “흙의 여백에 생각들을 가감없이 베껴 놓았다”는 그의 작품이 관객들에게 새로운 감흥으로 다가가길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