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회>의 반세기 : 한길홍의 생애와 예술
| 김복영 미술평론가(철학박사·전 홍익대 교수)
우리네 동양인들은 연이 깊을수록 필연을 염두에 두는 것 같다. 일찍이 인도인들이 생각해낸 것이 그러했다. 그들은 일체 중생의 삶이란 현재 그들의 삶을 귀결시킨 직접적인 원인으로써의 ‘인因’과 여기서 도래하는 간접적인 힘을 ‘연緣’으로 해서 생멸한다고 생각하였다.
좀 과장된 생각이긴 했겠지만, 일단 역사의 초기에 그렇게 생각한 이상, 삶의 세계를 이해하는 데 이보다 더 좋은 생각이 없어 정설로 자리매김 되었을 것이다. 이 생각은 그 지역에 머물지 않고 북북동진하여 5세기를 전후로 우리나라에 까지 전파되었다. 그들의 생각이 우리네의 사유思惟 역사의 한 갈래로 자리 잡으면서 무수한 종파와 교의를 낳았을 뿐만 아니라, 인생과 세계와 예술의 가능성을 점지하는 퍼스펙티브의 하나가 되었다.
서두에서 이 말을 하는 건 윤회사상이 한길홍(서울산업대학교 도자문화디자인학과 교수)의 작품 「윤회」와 무관치 않은데다, 그의 작품세계를 총체적으로 정의해줄 사유방식으로써 ‘윤회’를 좀 더 포괄적으로 해명할 필요 때문이다. 필자의 생각으로는 그의 「윤회」를 기존의 ‘윤회’라는 상식적인 틀로 해석하기 보다는 뭔가 알파를 추가함으로써, 좀 더 작가의 독자적인 이해의 틀로 자리매김 했으면 싶다.
한길홍의 시대와 <윤회>의 도정
한 교수는 4.19세대로서 우리나라 근대화가 한창이던 다사다난하던 시절, 어둠이 땅을 짓누르고 근대화와 산업화, 나아가서는 물질사회화로 기존의 가치체계가 전복되는가 하면, 갈등과 대결이 심화되던 시절에 대학을 다니고 작가로 성장하였다. 그가 우리 근대 도예의 제 2세대이긴 하지만, 이 와중에서 이 세대에게 공통하게 부하되었던 과제는 전통을 등에 지고 어떻게 선진 근대화를 일구어 내느냐는 거였다. 현대미술 진영 모두가 그러했지만, 도예계의 경우는 소위 ‘그릇도자’에서 ‘미술로써의 도자’를 발전적으로 껴안아야 하는 어려운 시기였다.
가난과 궁핍, 부조리가 팽배했던 시절, 이들의 세대의식 또한 밝기보다 어둠으로 채워졌다. 허다한 정신적 외상外傷으로 신음했고 이를 몸으로 감내해야 했던 시절이기도 했다. 그래서 ‘예쁜’ 도자보다는 한 시대를 짊어져야 할 운명을 내홍內訌으로 삼아 ‘총체물’로서 도자를 생각해야 하는, 이른바 제로점에서 예술을 시작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의 「윤회」는 결코 행복한 시대의 산물이 아니었다. 적어도 우리 근대사의 암울했던 족적의 상징체였다는 게 적절한 표현일 것이다. 우리 민족의 업보가 윤회의 고리처럼 얽혀 그의 「윤회」로 상징화되었다고 할 수 있다. 불교에서 말하는 ‘업’이 우리의 발목을 잡던 시절, 온갖 풍상을 그의 예술에서 찾아볼 수 있다. 아래서는 그의 도예 탐색사를 기술하면서 이점을 부각시켜 볼 것이다.
그의 제 1기는 성장기와 수학시절을 제외하면, 1970년대 초에서 1980년대 중반에 이른다. 다분히 탐색 시절이다. 이 시기는 ‘흙의 상상력’을 근간으로 1982, 1984, 1985년에 차례로 가졌던 개인전에서 그 모습을 드러낸다. 이무렵 필자는 그에 관한 평문(1984, 12 <서문>)에서 그가 생生을 중심으로 “도자예술이란 흙으로 주어지고 언젠가는 흙으로 되돌아갈 무한한 윤회의 산물이다”라는 작가 자신이 제기한 명제를 크게 부각시킨 바 있다. 당시 그는 물레성형보다는 흙의 코일을 줄지어 쌓거나, 판붙임을 통해서, 물레가 빚는 비자연적 형상보다는 흙 본래의 범汎자연태에 주목하였다. 기법으로는 판형 표면의 일부를 일그러트리거나 태토의 표면에다 실·붓·조각도의 흔적을 가해서 거칠고 자연스러운 분위기를 부각시켰다. 그럼으로써, 좀 더 유기적인 흙의 자연상相을 얻고자 했다. 이를 보다 강화하기 위해, 기형에다 작은 홀이나 요철을 넣어 자연의 여백·빛·소리 같은 진공성을 강조하는 건 물론, 점 같은 혹·운문·조류를 연상시키는 패턴, 흩뿌려진 유약빛깔의 격한 직선이나 자유롭게 긁어 만든 흔적 같은 패턴, 백색계나 갈색계의 양괴를 부각시켜 소담하고도 투박한 일면을 강화하였다.
<일부내용이 생략됩니다. 월간도예 2009년 4월호를 참조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