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즘ism 主義에서 유영遊泳하기 _ 정길영Jung Gil-Young
| 김성희 본지기자
작가 정길영(48)에게 도예란 회화작업의 연장선상이다. 캔버스에 그림을 그리 듯, 접시 위에 그림을 그리고, 설치를 하듯 기물을 만들고 조각을 한다. 구멍 뚫린 그릇과 상식적 비율을 깨는 손잡이, 입을 대기에 불편한 컵, 자신을 닮은 점토가면 등 장난끼가 가득 담긴 흙작업이 정길영의 작업세계다. 그를 만나기 위해 경기도 이천시 사기막골내에 위치한 그의 작업실을 찾았다.
1982년 영남대학교에서 서양화를 전공한 정길영은 학생시절 같은 학과 동기들과 대구의 That갤러리에서 첫 전시를 열었다. 학생의 신분으로 졸업이전에 기획전을 갖는다는 것은 그 시절 커다란 결심이자 모험이었다. 캔버스에 자신의 싸인을 넣어 전시한 작품에 대해 주위의 시선은 곱지 않았다. 그는 동대학원에 진학한 후 설치미술부터 비디오아트까지 다양한 작업을 섭렵하며 전시를 시도했다. 작품을 통해 주목받고 판매성과까지 좋아져 점차 작업에 자신감이 붙었고 졸업 후 대구에 작업실을 마련해 작가로서의 입지를 다져나갔다. 파인아트fine art 작가로 활동하던 중 2003년 경기도 여주에서 활동하는 이세용 도예가의 작업을 우연히 접하게 됐다. 자유로운 물성의 흙을 이용해 표현된 작품에 원하는 색감을 과학적으로 담아내는 도자예술의 매력은 그의 마음을 단숨에 사로잡았고 이세용 도예가에게 흙작업을 배우기로 마음먹었다. 어린 시절부터 꿈이었던 화가로서의 마음이 흔들리고 지인들의 만류도 있었지만 그에게 도자란 하나의 큰 캔버스일 뿐이었다. 그는 “그림이나 도예나 내가 하는 작업은 별반 다를 게 없었다. 그저 매체만 바뀌었을 뿐 전반적인 작품성향은 같기에 쉽게 결정했다”고 말한다.
2년 뒤인 2005년, 정길영은 경기도 파주시 헤이리 마을의 갤러리 식물감각에서 첫 도예전을 열게 된다. 애초 설치미술을 목적으로 전시하려던 그와 도자전시의 틀에서 벗어나기를 원치 않은 갤러리측의 생각이 틀렸기에 그가 원하는 전시는 잠시 미뤄두기로 했다. 이후 4년간 다섯 번의 개인전을 열었고 자신의 뜻대로 펼친 전시는 거의 없었다. 그의 백자와 분청으로 완성된 그릇들은 규격이나 형식보다는 즐거운 감성과 표현력을 우선으로 만들어진 것들이었기에 공예갤러리 측과의 마찰이 자주 생길 수밖에 없었다.
정길영은 수더분한 외모와는 달리 사람 만나는 걸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 흙을 만진지 7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지만 도예인들과의 교류는 거의 없었다. 늘 작업장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아 같이 작업을 하는 후배들과는 가족처럼 지낸다. 그 중 후배인 김도연 작가는 “선배님은 한 가지만 하시면 정말 좋은 작품 하실텐데”라며 충고를 하곤 한다. 그도 그럴것이 생활자기에, 그림에, 조각에 거기에다 얼마전에는 전시장 리모델링까지 손을 댔으니, 후배들로서는 왕성한 활동력에 대한 부러움 반, 걱정스러움 반이 생긴다.
그가 좋아하는 작가 중에는 뉴욕에서 활동하는 추상화가 이상남 씨가 있다. 1981년 당시 미술계 청년문화의 상징인 이상남 작가는 미국으로 건너가 ‘뉴욕타임스’와 미술전문지 ‘아트 인 아메리카’ 등에 독특한 회화적 언어의 작가로 소개되며 현재까지 뉴욕에서 활발히 활동 중이다. 정길영은 “뉴욕은 아이디어 창고다. 이상남 작가처럼 자신의 꿈을 펼치기 위해 언제나 새로운 것에 대한 도전정신이 필요하다”며 “늘 다양한 생각과 가치관으로 작업에 접근한다면 국내뿐 아니라 외국시장에서도 한국의 도자는 충분히 승산이 있다.”고 말한다. 현대도예를 추구한다면 상투적이거나 틀에 잡힌 진부함을 추구하는 것보다 과감하게 새로운 것에 도전하는 것이 작가 스스로의 발전을 위해 좋다는 뜻이다.
<일부 내용이 생략됩니다. 월간도예 2010년 2월호를 참조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