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음식문화 속 도자식기의 변화
| 이은욱 식기·음식연구가
도자사 속 식기의 의미
식기食器는 음식飮食을 담기위해 만들고 음식은 식기에 담겨졌을 때 비로소 하나의 음식으로서 완성된다. 자연식품을 채취해서 먹던 시기를 제외하고 식기는 음식과 서로 유기적인 관계를 가지며 발전되어져 왔다. 한 나라의 지배사상, 문화적인 영향, 농업과 어업의 발달은 음식의 발달과 분화를 가져오고 이는 곧 식기의 다양화와 기능의 발전을 요구하면서 그 시대를 대표하는 하나의 상차림으로 정립되어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지금 우리가 하루 세 번 만나는 식탁 문화가 얼마나 오랜 기간에 걸쳐 완성된 작품인지, 너무나 익숙하게 늘 접하는 일상의 문화이기에 이를 간과하기 쉬운 것이 사실이다.
우리는 식사를 할 때 주로 밥과 반찬을 먹는다. 혹자는 한식 세계화의 걸림돌이 바로 밥과 반찬문화 때문이라고도 한다. 밥을 먹기 위한 반찬. 외국인이 보기에 너무도 자극적일 수도 있다. 즐겨 먹지 않는 찰진 밥과 뜨겁고 짜고 매운 반찬이란 그들에게는 불편할 만한 일이다. 그런데 이런 밥과 반찬으로 구성되는 밥상차림이 이미 삼국시대三國時代부터 기본양식으로 정립되어져 왔다. 이전 시기의 밥은 찐밥의 형태로서 오늘날과는 다른 질감이었으나 삼국시대에는 무쇠솥의 보급으로 오늘날과 유사한 밥 짓기가 보편화되고 증숙기蒸熟器 시루의 발달은 떡을 의례음식으로 자리잡게 한다. 아울러 떡 이외에도 고기나, 생선을 쪄서 익히는 찜요리의 시작을 가지고 온다. 「위지동이전」에는 “고구려 사람들은 스스로 장양藏釀을 잘한다”고 서술한다. 여기서 장양藏釀이란 술빚기와 장 담그기, 채소절임 등의 발효식품을 말하는 것으로 장醬-간장, 된장 등의 저장식품, 시-장류, 포脯-고기나 어패류 말린것, 해-젓갈, 김치가 이미 이 시기에 상용기본식품으로 자리가 잡혔음을 가늠케 한다. 삼국시대의 김치는 채소를 소금에 절이거나, 소금과 쌀밥을 섞어서 절인 것으로 김치의 기원이 되는데 후에 해형型김치-젓갈을 넣은 김치와 침채沈菜김치-국물을 먹을 수 있는 동치미류의 김치로 분화 발달된다.
장류의 발달과 술, 기름, 식초의 사용으로 채소를 양념하여 무치거나 볶는 나물 요리도 시작되면서 지금의 찬饌류 음식의 기본이 자리 잡히게 된다.
식생활에서 음식의 발달은 조리용구와 식기의 종류가 다양하게 발전 하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식기는 주로 도기陶器, 칠기漆器, 금은기金銀器, 청동기靑銅器, 철기鐵器 등의 많은 종류의 식기가 사용되었는데 의례용기나 장식품이 아닌 보편성이 있는 식기로 도기陶器와 칠기漆器가 사용되었다. 일용식기로서 밥과 반찬을 담을 완,발鉢,합盒,반盤,배杯등이 이용되면서 장양藏釀문화를 바탕으로 한 호壺가 제작된다. 굽이 높게 제작된 이 시기의 식기는 후대로 갈수록 낮게 제작되는데 조선시대에 이르러 경배의 의미로 제기祭器에 다시 복원되어 사용되게 된다.
도기陶器에서 자기瓷器로의 발전은 도자사에서 큰 의미를 갖는다. 자기를 만드는 기술은 오랜 기간 중국의 전유물이었고 이는 유럽에 쉬누아즈리chinoiserie와 함께 자기를 갖고자하는 강한 열망을 불러일으키며 1709년 마이센Meissen에서 자기제작의 성공으로 이어진다. 우리나라는 12세기 고려시대에 이르러 자기를 제작하게 된다. 그런데 흥미로운 점은 고려시대 자기제작의 중심에 바로 차문화가 있었다는 것이다.
고려의 국교는 불교다. 불교는 깨달음을 얻는 수행과정에 교리를 공부하는 교종敎宗과 참선을 하는 선종禪宗이 있다. 고려의 불교는 선종으로 넓게 전파되는데 그에 따른 좌선에 필요한 차를 담는 다기로서 청자의 필요성을 이해하면서 요구하게 된다. 중국에서의 수입으로 수요를 감당하기 힘들자 제작기술을 배우며 완성하게 된 것이다. 자기의 제작기술을 도입하는 과정에 차이가 있지만 마치 일본이 차문화 발달로 인해 임진왜란을 일으킨 후 1616년 즈음 자기를 제작한 경우와 비슷하다고 하겠다.
새로운 음식문화는 새로운 식기문화를 만들기 마련이다
고려의 차 문화는 청자의 발전을 가져오면서 탁잔托盞, 완, 주자注子의 많은 제작으로 이어지게 된다. 나아가 차를 마시는 음다문화飮茶文化는 과정류의 발달을 가지고 온다. 과정류란 차를 마실 때 함께 즐기는 음식으로 약과, 다식, 강정, 전과, 과편 등으로 오늘날 까지 차와 함께 이어져 내려오는 음식이다.
고려시대에는 우리 식생활의 대표적인 부식인 국이 크게 발달된 시기로 밥과 국, 반찬의 기본적인 상차림이 구조화되면서 자연히 팽숙기烹熟器-구리로 만든 그릇으로 물을 끓이는데 쓰는 솥. 삶고 익히는 그릇, 탕호湯壺-탕기로서 국을 끓이는데 쓰는 것으로 고려인들은 차를 달이는데도 이용함, 발鉢의 대량제작을 요구하게 되었다.
불교가 국교인 고려에서는 육식이 금기시되면서 채소재배가 발달되고 식물성기름의 사용이 증가되어 기름에 튀기거나 지지는 조리법이 생겨난다. 채소재배의 발달은 보다 다양한 김치의 분화로 이어지면서 침채沈菜류 김치의 등장과 상추나 깻잎, 호박잎, 취등의 쌈문화를 가지고 온다. 또한 상화霜花-만두의 일종와 국수가 성찬음식으로 자리잡으면서 조선시대까지 크게 유행하는데 발鉢과 접, 저의 많은 생산을 가져왔다. 고려시대 원의 침략은 고려의 식생활에 큰 변혁을 가져온다.
육식민족인 원은 오랜기간 육류음식에 굶주려왔던 고려인에게 새로운 육류음식을 소개하면서 그들의 식습관을 크게 변화시켰다. 고려이전의 육류음식이 복원되고 원의 증류주법을 도입하면서 소주를 비롯한 탁주와 청주외의 다양한 술을 제작케 했으며 이를 담을 와존瓦尊-술을 담는그릇, 도존陶尊-술을 담는 오지그릇, 주합酒盒-술병, 반잔盤盞-술을 마시는 그릇으로 잔과 받침을 제작하게 된다. 고려도경의 기록을 보면 고려시대의 귀족은 단칠丹漆과 흑칠黑漆을 한 식탁과 연회용의 탁자에 딸린 식탁보와 수막繡幕-수를 놓은 가리개, 촛대 등의 화려한 장식물의 이름이 등장한다. 식탁의 경우 그 넓이가 2~3자(60~90cm), 높이2.5자(75cm)가 되었으며 식기는 청자식기를 사용하였다 한다. 현재 우리의 상차림과 비교할 때 오히려 더욱 화려하고 기품이 있을 것이라는 데는 의심할 여지가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