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예숙의 작품에는 ‘굵기’가 있다. 그 동안 그가 만든 많은 작품들에서 느꼈던 것은 투박에 가까운 굵은 맛이었다. 조각적인 모뉴먼트들을 포함해서 작은 잔 하나에도 황예숙 특유의 굵기는 항상 존재하였다.
언제인지는 모르지만 황예숙의 머그를 하나 샀던 기억이 있다. 머그의 크기도 그러려니와 손잡이 역시 범상하지 않았다. 마치 허공에 감자를 먹이는 듯한 주먹과도 같은 손잡이는 굵고 튼실하였다. 물론 황예숙이 머그라는 용기의 규범을 모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은 머그에 그런 대담한 조형을 구현하려는 의도는 무엇이었을까? 이러한 의문에 대해 황예숙은 간단하게 답하였다. 성격이라고...
물론 생활과 작품제작을 위한 자본 확보를 빌미로 수요자들의 비위를 맞추려는 노력도 한 적이 있지만 그리 오래가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스물 한번의 개인전 가운데 대부분이 ‘도자조각’을 표방하였다. 또한 ‘도예전’이라고 이름 붙인 몇 안되는 전시에 내놓은 것들도 앞서 말한 우람한 머그와 용기들이었기 때문이다.
이쯤 되면 그가 말한 ‘성격’의 정체가 무엇인지 대략 짐작할 수 있다. 결국 황예숙은 본인의 말대로 아트와 크래프트라는 세속적 구분에 대해 갈등을 하여 왔지만 종국에는 전자를 택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성격때문에... 그래서 그의 작품은 성형되었다기 보다는 구축된 인상을 주며 돌이나 쇠보다 육중한 양감의 조형을 갖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번 개인전(<향유 Enjiyment 享有>2008.10.22~28 서울 인사아트센터)의 작품은 조금 다른 양상을 띠고 있다. 황예숙은 ‘가구’라 하였다. ´도자가구´, 실제로 작품을 보기 전까지는 그 동안 해왔던 선이 굵은 조형의 연장이라 짐작했다. 몇 작품은 그랬다. 풍부한 볼륨의 다리와 두꺼운 상판으로 이루어진 테이블들은 예상대로 황예숙 특유의 굵기와 무게감을 가지고 있었다.
새롭게 시도하였다는 ‘가구’는 의외였다. 그것은 단층장이나 이층장과 같은 형식의 것으로써 그동안 해왔던 선 굵은 ‘가구’가 아니라 얇은 느낌의 판에 의한, 앞이 열리는 그런 장이었다. 그러나 문짝이 있어야 할 곳에 신라토기의 투창을 연상케하는 구멍들이 뚫려있고 또 머리 위에는 물고기도 아닌 새도 아닌 툭툭한 살점에 즐거운 표정을 가진 유머러스한 동물들이 진을 치고 있다. 전면에는 민화에 나오는 꽃과 여러 가지 문양들이 다채롭게 표현되어 황예숙 다운 조형과는 별개의 것으로 느낄 정도였다. 이름하여 가구였지만 선뜻 가구로 받아들이기에는 어려운 물건이었다. 더욱이 그것들이 잔디밭에서 늘어서 있는 것을 보니 집안에 두고 물건을 넣을 가구는 더더욱 아니었다. 만약 문틀이라도 네모반듯했다면 어느 정도 수긍을 하였으련만 각기 다른 모양의 문틀은 기능을 떠나 하나의 기표처럼 느껴졌다.
루치오 폰타나는 캔버스를 찢음으로 새로운 공간을 발견하였다. 황예숙은 ‘가구’라는 기능적 사물의 명칭을 빌어 굵은 조형에서 공간을 찾고자 한 것이 아닐까. 그래서 그의 ‘가구’들은 가구라고 해도 되고 아니라고 해도 될 것이다.
그러나 가구이기도 하고 아니기도 한 것들에 대한 황예숙의 의도는 명백하였다. 이번의 작품들은 지금까지 자신이 번뇌하였던 아트와 크래프트에 대한 갈등을 청산하려는 가짐새라고 짐작된다. 제작자 본인은 물론 소비자와 향수자 모두가 함께 나누고 즐길 수 있는, 향유라는 방법을 통해 앞으로의 작품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 넣으려 한 것이다. 그래서 지금까지의 발표해왔던 선이 굵은 작품들에서 새로운 공간을 찾으려 하였고 육중한 조형의 무게를 덜기 위해 유머러스한 동물들과 표면을 꾸미는 문양들을 도입하였다고 판단된다.
이러한 시도들에 대해 황예숙은 조심스럽고 실험적이라고 뒤로 한 발을 뺐지만 자신의 ‘성격’을 이길 수는 없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굵은 조형에서 만족하지 않고 그 안에 가려져 있던 공간에 대한 모색 그리고 작품을 매개체로 문화적 교감을 사람들과 나누고 함께 향유함으로써 굴기堀起하려는 조심스런 의지를 보았기 때문이다.
(본 기사는 일부자료가 생략되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월간도예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