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무엇에 대해 반란하고 싶은 것일까?
도예가 이종능은 지난 30년 동안 ‘토흔土痕’이라 스스로 명명한 새로운 그릇의 미학을 외길로 추구해 온 작가이다. 천년 도자기의 역사가 이루어 온 흙의 흔적, 이 땅에 배어있는 우리 삶의 정서가 배어 있는 흙의 흔적, 지구상의 그 어떤 곳과도 다른 우리만의 색깔과 질감을 가진 흙의 흔적, 그 흔적을 그는 ‘그릇’이란 형태로 담아내려 노력해 왔다. 그는 도자기 속에는 우리의 역사와 우리의 흙의 맛과 우리의 삶의 정서가 함께 농축되어 있다고 믿는 사람이다. 그가 자신을 도공 즉 그릇 만드는 사람이라 불리길 원하는 것은 이런 도자기를 만드는 작업 속에서 자신이 작업하는 재료인 ‘흙’과 조금의 거리도 없는 완전한 일체를 이루길 바라길 때문이다. 이것이 이런 흙 작업에서 아무도 작가 이종능의 세계를 침범할 수 없는 이유였던 것이다.
그런 작가가 <흙의 반란>이란 명제를 내걸었다. 누구보다도 흙에 대해서 천착穿鑿하며 그것을 자랑으로 하는 작가가 흙의 반란을 도모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무엇에 대해서 반란을 하고 싶은 걸까?
<생각하는 사람>이, <미륵반가사유상>이 흙 속에서 솟아나온다. 그 밑의 그릇들은 누워있다. 마치 천 년 전 옹관과 같다. 인각중생의 구원을 고민하며 중생의 고통에 마음 아파하고 있는 인간 구원의 상징을 반가사유상과 지옥의 문 위에서 현세 인간의 고통을 바라보고 있는 인간 자각의 상징을 생각하는 사람이 도자기와 새로운 형태로 결합된다. 도자기는 아마도 인간이 만들어 왔고 앞으로도 유지해 나갈 인간문명의 가장 소박한 상징일 것이다.
도자기는 인간이 자연을 이용해 창조할 수 있는 가장 우연적인 아름다움의 최고봉일 것이다. 인간의 손끝에서 시작해 자연의 오묘함 속에서 완성되어 다시 인간에 의해 향유되는 도자기... 예술작품으로써의 도자기를 만드는 작업은 그 누구도 섣불리 공식화할 수 없는 자연과 인간의 미묘한 교감을 감지하는 이들에 의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도자기를 감상함으로써 그 지고지순하며 동시에 찰나적 우연을 소비한다.
그러나 현재 인간 지성이 이룩한 과학의 업적은 자연을 측정하고 공식화하고 관찰하고 쪼개면서 이 세계를 급속도로 발전시키고 있다. 그 방식에 익숙해진 사람들은 더 이상 도자기의 고전적인 스토리에 주목하지 않는다. 도자기는 그 속에서 자신의 존재감에 의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흙의 반란으로 명명된 이 작품들은 인간 사유의 대명사로 일컬어진 가장 대중적이며 고전적인 예술적 이미지를 차용함으로써 이 시대 도자기가 가진 예술적 고민을 표현한다.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과 반가사유상-인간의 사유와 종교적 구원을 상징하는 이 두 자기 예술 작품이 도자기를 뚫고 나오는 형상을 통해 작가는 도자기라는 예술분야가 이 시대에 당면한 사유적 한계와 앞으로 나아가야 할 예술의 지향점에 대해 질문을 던진다.
고전적 형태의 도자기는 자신을 눕혀 현재의 고민을 웅변한다. 스스로를 가르고 고백하는 모습 속에는 인간이 자신의 존재에 대해 탐구하던 순수의 순간들이 담겨 있다. 무엇이든 다시 흙 속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는 엄연한 진리 속에서 토흔土痕은 이 시대가 요구하는 예술 형태에 대해 고민하고 동시에 미래 인간이 목말라 할 진리의 한켠을 예측하려 하는 것이다.
도예가 지산芝山 이종능은 자신의 손끝과 시선에서 자연의 가장 불안하고 섬세하며 날카로운 속성과 교감해 왔다. 그것은 바깥세상의 수선스러움과는 격이 다른 절대 진리의 세계인지 모른다. 이미 그 세계와 교감한 작가가 21세기 현대적 이미지에 둘러싸인 인간들에게 도자기 고유의 진리에 대해 함께 고민해 보자고 손을 내미는 것이다. 이를 위해 작가는 종교와 철학, 동양과 서양의 가장 오래되고 그래서 불변이라 일컬을 수 있는 사유의 두 이미지를 도자기와 결합시킴으로써 21세기 흙의 반란이 어디로 향해야하는지에 대해 스스로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
<본 사이트에는 일부 내용이 생략되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월간도예 2008.7월호를 참조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