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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8.10월호 | 작가 리뷰 ]

인격으로서의 도자기-고故 이종수
  • 편집부
  • 등록 2009-06-13 14:2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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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윤희 대전시립미술관 학예연구실장


지난 2008년 8월 3일, 대전시립미술관에서 100일간 치러진 이종수 선생의 특별초대전이 막을 내렸다. 이종수 선생은 무의식중에도 이 전시의 마무리 소식을 접하려고 병고를 견뎌냈다. 그리고 삼일 뒤, 그는 안도의 긴 숨을 쉬고 영면에 들어갔다. 많은 사람이 함께 모여 그가 마지막까지 보여준 철저한 작가정신과 수많은 일화를 나누며 그를 그리워한다. 


기器의 형이상학
인간이 갖는 아름다움에 대한 느낌은 개별자가 갖는 주관적인 것이지만, 또한 그것은 동시대의 삶의 형태와 더불어 세대를 거쳐 이어오는 유전형질遺傳形質에도 깊이 이어져 있다고 생각된다. 이종수의 도자기 작품에서 아름다움을 느끼고 찬탄할진대, 그 이유를 설명하고자 할 때는 작품이 가진 특성들 뿐 아니라 동시대의 삶과 예술의 세태와 통사적인 문화적 기억들이 빠르게 뒤섞이며 복합적으로 작용됨이 느껴지는 것이다. 세상의 도자기들 가운데 어느 것은 아름답고 어느 것은 아름답지 않은데, 그것은 수없이 보아 왔던 기器의 형태들 가운데 우리의 미감이 선택적 작용을 하는 것이라 여겨지며, 또한 이것이 이종수의 도자 작품들을 바라보면서 ‘아름다움이란 무엇인가’라는 답을 얻을 수 없는 미학의 근본 질문을 던지게 되는 이유라 생각된다.
그릇의 형태는 인류 생존의 근본적이고 필수적인 발명품이었다. 구석기시대 암각화에 뿔잔을 든 인물 등이 등장하는 바, 담는 용기容器의 필요는 최초의 인간으로부터 시작된 것이겠지만, 세상에 널린 흙을 재료로 하여 오늘과 같은 그릇을 만들기 시작한 것은 신석기시대부터였고, 그 이후 인류의 문명사 속에는 시간을 이긴 고전古典으로써의 도자기들이 존재한다. 현대인은 지난 만년동안 인간이 빚고 사용해 온 도자기들, 수천수만의 도자기들을 볼 수 있을 뿐 아니라 여전히 매일 삶 속에서 도자기를 보고 있다. 따라서 그 어느 예술 장르보다 도자는 인간에게 친밀도가 높을지도 모른다. 어떤 그릇의 형태를 보고 아름답다고 느끼는 것은, 인류 문명이 시작된 이래 수없이 빚어온  기器 형상에 대한 제의적 찬미를 포함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이종수의 작품들이 대부분 그릇의 형태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주목할 만한 지점이다. 형태만으로 보자면 대부분 조선시대의 달항아리 모양을 연상시키지만 그것은 최근 무분별하게 범람하는 옛 것의 ‘차용’도 아니고 옛 것을 나의 대代에 ‘되살려’ 보겠다는 투철한 전통계승의지의 표명도 아니다. 그의 도자는 이념적이기보다는 체질적으로 전통성을 띄고 있는데, 그렇다고 해서 체질적 전통성이 그의 작품세계의 전부가 아니다. 둥근 항아리 형태를 벗어나 디자인적인 도안에서 출발한 많은 구상적 형상의 도자기들, 그리고 추상 충동을 느끼게 해 주는 파격적인 형상들의 작품들은 그의 또 다른 미감을 보여주고 있다. 그것들이 모두 그릇의 형태를 기본으로 가지고 있지만, 그것은 실용성이 있고 없고의 문제를 떠나 있다. 그의 작품에는 흔히 현대 도예에서 말하는 도자 조각과 실용적인 도자의 면모가 다 포함되어 있고 이것이 더 옳은 도자기의 모습이라고 주장하는 개념적인 경계가 무색하리만치 논쟁을 벗어나 있는 것이다. 마치 그의 작품은 기器의 이데아Idea가 분유分有할 수 있는 모든 개별자들의 가능성을 시험하듯이 모두 다른 얼굴의 다른 아름다움을 가지고 존재하고 있다.

사람이 빚고 자연이 완성시키는 작품
도예가 이종수를 소개할 때 인상적으로 이야기되는 것들 중 하나는 그가 젊은 시절 이화여대 교수를 잠시 하다가 그만두고 낙향하여 전업작가의 길을 가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 당시 우리나라에서 교수라는 직함이 가지는 사회적 경제적 의미를 생각할 때 여러가지로 쉽지 않은 결정이었으리라 생각한다. 그것은 분명 그의 성품의 일단一端을 짐작케 할 수 있는 사건임은 분명하다. 그러나 작업세계를 이야기함에 있어서는, 교수직을 그만두고 낙향한 것과 동시에 발생한 일이기는 하지만, 그가 홀로 가마터를 일구고 가마를 지어 작업을 다시 시작했다는 것이 더욱 중요한 요소로 기억되어야 할 것이다. 그의 작업에 있어서 불을 지피고 불길 속에 넣어 둔 작품의 결과를 기다려 그것의 생사를 가르는 일은, 작업의 전 과정을 통틀어 가장 중요한 일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는 우스갯소리로 지인들이 가마에 불 땔 때 한번 부르라 그때 한시름 놓고 한잔 하자는 이야기들을 한다면서, 사실은 그때가 가장 긴장되는 때이고 하던 일을 모두 멈추고 결과를 기다려야 하는 때인데 그걸 모르더라고 말하곤 한다. 흙을 골라 빚고 굽고 시유한 뒤 그것을 온전한 작품으로 탄생케 하기 위해 불길 속으로 들여 보내고 마음으로 누르고 기도하며 결과는 기다리는 최후의 시간을 보내면서 이미 모든 것이 끝났다는 듯이 유쾌하게 술마시는 시간을 가지는 것은 적당치 않다는 말이다. 그런 이유로 그는 자신의 작업과정을 설명하는 글 속에서 불을 지펴 도자기가 구워지는 이 과정을 산고産苦의 고통을 기다려 아이를 낳는 순간에 비유한다.(주1, 김형국 편, <불과 한국인의 삶>, 2001, 나남출판, pp.58~64)
그의 가마터는 실로 인상적이다. 비스듬한 지형을 이용하여 계단식으로 여러 개의 칸이 이어져 있는 오름새가마登窯는 전통적으로 이어져 온 가마의 형태이다. 오늘날 아궁이에 장작을 때서 방을 데우는 집이 사라지듯이 가스, 전기 등의 새로운 연료가 사용되는 현대에 와서 당연히 사용이 줄어들 수밖에 없다. 여러가지 이유가 있을 것이지만 장작을 때는 전통가마가 더 이상 사용되지 않는 가장 큰 이유는 변수變數들을 통제하기 어렵기 때문일 것이다. 불을 지피는 날의 기후나 땔감의 상태, 그리고 어느 도자기 옆에 어떤 성질의 땔감이 위치하는가의 문제 등이 복합적으로 가마 안에서 재현 불가능한 특수 상황을 만들어 작품을 완성시키는 것이다. 사람이 태어나는 과정 속에서 인간이 개입할 수 없는 최후의 과정이 존재하듯이 그의 작품이 태어나는 과정도 자연의 선택에 내 맡길 수밖에 없는 순간이 존재하는데, 이것은 단지 작품제작의 결정적인 과정을 우연에 맡긴다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통제 가능성의 한계를 받아들인다는 의미로 이해하는 것이 옳다. 아마도 바로 그 지점이 분명 인공의 산물인 그의 작품이 자연의 성격을 지닌 것처럼 느껴지게 만드는 부분일 듯싶다.
고운 균열이 가 있는 그의 백자들, 그리고 표면이 갈라지고 터져 있는 토기 형상의 작품들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분명 그것은 사람의 손이 조작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느껴진다. 재료의 내적인 법칙, 즉 흙과 유약과 공기와 불이 만나 사람이 수치로 계산할 수 없는 어떤 법칙이 구현되어 만들어진 결과로 보여진다. 사람의 손이 자연 비슷하게 조작한 것이 아니라 자연의 손길이 닿아 만들어진 것으로, 그래서 그 표면들은 나뭇잎의 잎맥이나 보석의 결정면, 이른 봄볕에 쌓인 눈이 녹는 모양, 혹은 가뭄에 갈라진 땅과도 같이 자연의 아름다운 어느 부분을 훔쳐낸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본래 흙과 물로 토기를 빚어 불과 공기로 단단히 만든 것이 도자기의 근본이지만, 그의 작품은 그들의 셀 수 없는 조합의 가능성을 작품의 일부로 인정하는 작가의 태도가 더해져 있다. 그의 작품에는 자연이 스스로 작품에 손길을 뻗어 만든 자연의 문양이 아로새겨져 있는 것이다.

 

<본 사이트에는 일부 내용이 생략되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월간도예 2009년 1월호를 참조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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