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각은 흙의 한계를 다스리는 도자기법 중 대단히 세밀하고 정교한 기술이다. 날선 칼의 기교로 표현되는 투각 기술은 단 한 번의 실수로 다루는 이의 노고를 허사로 만들기도 한다. 특히 성질이 가장 예민한 백자투각 다른 재료의 흙 작업에 비해 녹록치 않은 공력과 숙련도를 필요로 한다. 백자투각 한 분야로 꾸준히 작품 활동을 하는 도예가가 드문 것도 이같은 이유에서다. _?xml_:namespace prefix = o ns = "urn:schemas-microsoft-com:office:office" />
무토撫土 전성근(49)은 이중투각과 조각 기법으로 주목을 받고 있는 도예가다. 그의 작품은 최근 미국 크리스티 경매에 수차례 선보이며 해외 도예 애호가들로 부터 큰 관심을 모으고 있다. 그의 도예와 맺은 인연과 자신의 작품세계를 통해 이루고자 하는 꿈을 들어보자.
목공예에서 흙으로 옮겨간 조각술
무토. 도예가 전성근의 호이자, 작가의 공방 이름이기도 하다. ‘무토撫土의 ‘撫’는 ‘어루만지다, 누르다, 손에 쥐다.’를 뜻한다. 따라서 ‘무토’는 ‘흙을 어루만지다.’라는 의미이다. 흙의 느낌이 좋아 투각을 시작했다는 그의 흙과 맺어진 인연 그리고 흙을 향한 마음이 고스란히 담겨져 있다.
전성근은 1959년 경북 고령출신으로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조각칼을 잡았다. 어려서부터 남다른 손재주로 동네 어른들의 도장圖章 파주기와 판화그리기를 즐겼던 그는 조각에 빠져 학업을 중단하고 손끝의 정교한 기술을 요하는 목공예를 시작으로 공예에 발을 들였다. 명망 높은 스승을 모시거나 정규 교육을 받지 않았지만 그의 칼 조각 솜씨는 특별했다. 목공예를 시작으로 불교조각과 FRP조형물 제작 등을 시도하며 기량을 쌓았다. 1984년 기능올림픽 목공예부문 동상을 수상하며 목공예조각분야에서 섬세하고 독특한 기법으로 명성을 알리기 시작한 그는 1984년 경상북도 경주의 월성요업에서 처음 흙과 인연을 맺게 됐다. 당시만 해도 고수입이 보장됐던 목공예를 버리고 도자조각의 길로 들어선 것이다. 그는 당시를 “어릴 때부터 계속 칼을 잡고 깎는 작업을 했었죠. 흙 조각 일도 내가 했던 작업의 연장선이었고 단지 재료가 나무에서 흙으로 옮겨간 겁니다. 이유는 아주 단순해요. 흙의 질감이 너무 좋았습니다. 나무는 눈으로 결을 보고 그 결을 따라 조각하지만 흙의 결은 마음으로 보아야 할 것 같았습니다. 흙 맛에 심취하게 된 것이죠.”라고 회상한다.
그는 1985년 경기도 여주로 옮겨와 본격적인 흙 조각가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그의 뛰어난 칼조각 솜씨는 남들보다 2배 이상의 급료를 받게 했고, 10여 년간 도자조각가로 활동하며 쌓아온 경험으로 1999년 자신의 작업공간 ‘무토’를 마련할 수 있었다.
정교한 칼날의 기교와 따뜻한 감성의 만남
전성근의 작업은 흙으로 반 건조된 기물 표면에 밑그림 과정 없이 바로 문양이 새겨져 투각되는 것이 특징이다. 기역자(ㄱ) 상감칼의 각도를 적절하게 바꿔가며 마치 종이 위에 연필로 그리듯 기벽위에 필치로 다양한 문양의 윤곽을 파낸다. 빠른 속도로 문양을 만들어 나가면서 자연스럽게 구도를 잡고 매화며 모란이며 동백, 새, 호랑이, 용 등의 문양을 얻어내는 솜씨는 가히 달인의 경지에 이른 듯하다. 도자기의 전면에 퍼져 고도의 기교로 표현된 정교한 칼질은 전통적 도자조각의 완벽한 치밀함과 현대적 간결함, 단정함을 동시에 느끼게 한다. 장인정신과 공예성의 본질로 전통을 대변하면서 현시대에 잘 녹아드는 기교로 승화되고 있는 것이다. 특히 그의 연작 중 한글의 자음·모음을 도입한 투각문양은 절제된 여백의 미와 기하학적인 선·면 처리로 현대조형감각을 십분 발휘하고 있다는 평을 받기도 했다.
매순간 칼끝의 평정을 잃지 않아야하는 투각기법의 세계는 냉혹하다. 자칫 잘못하면 인간적 감성과의 단절을 가져와 작품의 내용과 의미를 방해할 수도 있다. 하지만 전성근은 소년같이 순하고 넉넉한 성품을 지녔다. 그 덕인지 그의 조각에는 날카로움에 대한 거부감보다 따뜻한 흙 맛이 더욱 크게 발현된다. 조각칼로 인한 고도의 기술은 여느 도자투각작품에서도 발견하기 어려운 부드러운 선을 만들고 그 선은 특유의 따뜻한 감성을 표현해 낸다. 선으로 인한 부조적 양감의 명암은 개개의 요소들을 현존하는 자연 속 생명체로 느끼게 할 정도다. 또한 빛의 강약에 따라 변하는 백색 자기토의 오묘한 색상은 각도에 따른 양감의 시각적 변화와 어우러져 깊은 맛을 준다. 이는 작가의 조각 표현이 단순히 기술적인 면을 보여주는 것만이 아니라 감성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해외에서 주목받는 백자 투·조각 기술의 행보
창작과 모방의 경계가 모호하게 구분되고, 현대조각 작품만이 진정한 창작품인양 인식되는 현시점의 미술계에서 시류에 얽매이지 않고 묵묵히 자신의 길을 걸으며 전통기법에서 발현해낸 백자에 대한 투각과 조각의 절제미를 탐닉하는 작가는 흔치 않다. 20여 년 간의 수련을 바탕으로 백자투각, 조각기법이라는 차별화된 작업 세계를 펼치고 있는 전성근은 도예가로서 나름의 소명의식과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그는 “도예를 제대로 배운 것도 아니고 물레질을 잘하는 것도 아니지만 우리 공예 속 투각에 대한 제 자신의 관심과 재능을 반영시키다보니 자연스럽게 한 길을 걷게 되었다. 투각이라는 작업은 엄청난 집중력과 정교함을 요하기 때문에 시력이 허락할 때 까지만 가능하다. 앞으로는 투각과 조각을 병행하여 더욱 정교한 작품을 하고 싶다.”고 한다.
최근 도예계에서 백자투각 도예가 전성근에게 거는 기대가 만만치 않다. 그가 2003년 세계도자비엔날레 워크숍을 비롯해 2004년과 2008년 미국 뉴욕 크리스티 경매전 출품, 2006년 독일 텐덴츠박람회 초대, 2007년 독일 프랑크푸르트 국립박물관 작품소장 등 해외에서 더욱 주목받고 있는 활동을 보이고 있어서다. 이는 더욱 국제화된 예술문화 교류시대 속에서 한국의 전통적 요소를 탐닉하고 현대공예작품에 투영해 내는 것이 우리 도예계의 새로운 전기轉機를 마련할 수 있는 방법이라는 것을 증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도예가 전성근이 추구하는 새로운 백자 투·조각 기술이 세계로 향해 어떠한 행보를 보일지 주목해야 할 이유가 그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