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의 색깔들, 이는 작가의 근작의 제목이며 주제이다. 일상에다 색깔을 부여한다면 어떤 색깔이 될까. 일상을 색깔로 환원한다는 것은 일상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일상을 치열하게 산다는 말이다. 그럴 때 비로소 일상은 자기 속에 품고 있던 색깔의 결들을 보여줄 것이기 때문이다(여기서 색깔은 일상의 속성이기보다는 다소간 주체에 속한 것이다). 이때 일상이 일률적이지 않은 만큼 그 색깔 또한 균일할 리 없다. 일상은 외관상 어슷비슷해 보일 뿐 사실은 그 이면에 서로 차이 나고 이질적인 사건들과 순간들의 연속으로써 축조돼 있다. 둔감한 감성의 소유자는 결코 그 차이나 순간들을 캐치하지 못한 채 흘려보낸다. 그런가하면 일상이 자신에게 감동을 줄 때 그 색채는 화려하게 빛날 것이며, 일상이 무미건조할 때 그 색채는 우울한 기분을 불러일으킬 것이다. 일종의 환경결정론과도 통하는 이러한 발상은 주정주의의 한 전형을 예시해준다. 즉 자신의 내면을 프리즘 삼아 세상을 들여다본다는 것인데, 옥현희의 경우 그 프리즘은 내면적이기보다는 외면적이고 내향적이기보다는 외향적이다.
이로써 무미건조할 수 있는 일상이 긍정의 빛으로 밝게 빛나고, 무의미한 삶은 유의미한 존재이유를 덧입고 재생된다. 이렇게 일상에서 받은 인상을 색채로 환치시킨다는 점에서 일종의 공감각을 실현하고 있는 작가의 작업은 일상성 담론과도 그 맥락을 같이 한다. 평범한 것들, 범속한 것들, 반복적인 것들에게서 진정한 삶의 의미와 함께 존재의 이유마저 발견하는 것이다. _?xml_:namespace prefix = o ns = "urn:schemas-microsoft-com:office:office" />
전통적으로 도자기는 여러 형태의 용기를 의미하지만, 현대도예는 이런 그릇으로서의 기능적 측면과 함께 고유의 조형적 특질을 극대화하고 있다. 흔히 도조로 알려진 이 경향은 최소한의 기능마저도 결여한 채 순수하게 미적 향수만을 위해 제작되기도 하는데, 이러한 소위 순수도예는 이제 더 이상 낯설지 않을 뿐만 아니라 현대미술을 선도하기조차 한다.
진작부터 현대도예의 이러한 잠재력을 인식한 옥현희는 그 조형적 특질을 바탕으로 해서 다양하게 변주된 형식을 전개해오고 있다. 그의 작업은 특히 페이퍼포셀린 즉 일종의 종이도자로 범주화된다. 종이펄프와 도자기 흙(고령토)을 혼합해 만든 재료로써 형상을 빚은 연후에 그 표면에 채색을 가하거나 그림을 그려 넣는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유약을 발라 불에 구워 건조시키는 번조과정을 거쳐 화면에서 볼 수 있는 자잘한 조각의 형상들을 만들어낸다. 그런 연후에 이 조각들을 캔버스 표면에다 부착하는데, 그 방법이 일종의 모음그림이나 모자이크를 연상시킨다.
이렇듯 형상의 편린들을 임의적으로 조합함으로써 하나의 전체형상을 재구성해내는 것이다. 이렇게 재구성된 형상은 그 이면에 전체와 부분이 유기적으로 어우러져 있는, 즉 부분이 그 개체성을 상실하지 않으면서 동시에 전체형상에 유기적으로 연속돼 있다. 여기서 부분과 부분과의 관계는 단순한 형식논리의 경계를 넘어 그 자체 삶의, 존재의 메타포로서의 의미를 가진다. 이를테면 부분과 부분이 어우러져 전체형상을 만들어내는 것과 마찬가지로 여러 이질적이고 단편적인 사건들이 모여 주체를 빚어내고 일상을 축조해낸다. 그리고 그 일상들이 모여 역사가 되는 것이다. 부분과 부분과의 관계는 말하자면 의식적 자아와 무의식적 자아와의 관계, 또는 주체와 타자와의 관계로 확대 재생산된다. 하나도 똑같은 것이 없는 조각들이 모여 나를 만들고 너를 빚어낸다. 내 속에는 네가 들어와 있고, 너에겐 내가 스며있다. 나는 너와 통하고 너는 나에게 연속돼 있다. 나는 말하자면 이질적인 타자들의 우연하고 무분별한 집합으로써 축조돼 있는 것이다. 부분과 전체와의 유기적인 관계에 바탕을 둔 옥현희의 작업은 이처럼 주체의 자기반성적인 성질을 암시하며(자기 내면의 무의식적 자아와 대면케 하는), 한편으론 주체와 타자가 서로 어우러진 상호영향적인, 상호내포적인 관계를 주지시킨다.
분수처럼 내 머리가 뿜어낸 사념들이나 내 가슴이 게워낸 느낌의 편린들은 어슷비슷하지만 다 다르다. 일상이 그렇고 타자와의 관계가 그렇다. 어제와 똑같은 일상을 맞이하고 매일 같은 사람과 대면하는 것 같지만, 실상은 매 순간이 다른 순간과 비교할 수 없는 유일한 순간들이며, 돌이킬 수 없는 시간들이다. 작가는 그렇게 삶의 매순간마다 형상들을 부여해주고, 시간의 결을 덧입힌다. 이로써 마치 끝도 없이 이어질 것만 같은 이야기의 나래를 펼쳐 보인다. 객관의 표상이 아닌 사적인 감정의 편린들을 열거해 보이는 것이다. 그러나 주관적인 사건이나 사사로운 감정을 내포한 삶의 흔적들이란 게 누구 할 것 없이 어슷비슷하기에 쉽게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다. 형이상학적 진리나 진실 그리고 이념과 같은 거대담론 대신에 작가는 소소한 일상에의 경험이나 감정으로부터 길어 올린 미시서사, 개인서사, 작은 이야기를 통해 감동을 자아내는 것이다. 이를 통해 소시민적 생활감정에 바탕을 둔 일상을, 그 사적이면서도 절실한 사건을 되돌아보게 한다.
옥현희의 작업은 흙을 재료로 한 조형작업이란 점에서 현대도예에 그 맥이 닿아있지만, 평면화의 경향성이 강하다는 점에서는 그 인상이나 생리가 도조보다는 회화에 가깝다. 특히 온갖 현란한 색채들의 향연을 연상시키는 화면이 이러한 회화로서의 인상을 강화시켜준다. 작업의 주요 특징으로는 무엇보다 형상 하나하나에 덧입혀진 투명하고 맑은 발색효과를 들 수 있다. 보통의 페인팅을 통해서는 구현하기 어려운 이 선명한 색채나 아름다운 발색은 불의 번조과정이 있었기에 비로소 가능해진 것이다.
그 과정을 보자면, 작가의 작업은 기본적으로 흙을 빚어 만든 것인 만큼 형상의 두께나 소지의 질이 균일하지가 않다. 따라서 가마 불을 통해 건조하는 과정에서 상당수의 형상들이 왜곡되거나 표면에 균열이 생긴다. 흙이 머금고 있는 수분이 증발하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급작스런 수축 현상은 때로 예기치 못한 형상을 안겨주기도 하지만, 많은 경우 그냥 폐기된다. 이런 지난한 과정을 거친 연후에 여전히 원형을 유지하고 있으면서도, 이로 인해 오히려 처음보다 더 환상적인 발색효과를 갖게 된 형상들만이 작업을 위해 최종적으로 선택되는 것이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은 그대로 삶에 대한 유비적 표현을 암시해준다. 즉 사연의 종류나 그 강도에 차이가 있을 뿐, 환경을 견디고 상처를 삭여내는 과정을 결여한 삶이란 없다는 것. 일상은 그저 진부하고 반복적인 것 같지만 사실은 그 이면에 치열한 삶의 과정을 응축하고 있다는 것. 이런 점에서 삶은 아름답다. 옥현희의 일련의 작업들은 이처럼 지난한 과정 위에 축조된 일상을 긍정하고, 생의 축제를 연상케 한다. 범속한 것들, 평범한 것들, 소소한 것들로부터 진정한 삶의 의미를 발견해내는 한편, 이를 통해 일상에 대한 찬미를 주제화하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