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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8.04월호 | 뉴스단신 ]

9세기의 귀중한 도자기 서적 하재일기
  • 편집부
  • 등록 2009-06-13 12:59:46
  • 수정 2009-06-13 13:0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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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구한 도예 역사를 가지고 있으나 기록이 많이 남아있지 않은 도예계에 모처럼 역사적, 사회적, 경제사적으로 귀중한 책이 번역되어 출판되었다. 아쉬운 일은 출판된 지 2년이 흘렀지만 일반 서점에서 구할 수 없거니와 개인적으로도 책을 구한다거나 빌려 보는 일도 쉽지가 않다는 사실이다.
책의 제목은 하재일기荷齋日記로서 호는 하재이며 지씨 성을 가진 사람의 일기이다. 그는 분원 백자 도요지에서 생산된 각종 도자기를 궁궐과 관청, 종로 등지의 그릇 가게를 수시로 오가며 그 사이에서 주문, 납품, 중개, 지방사기의 감시 등을 주 임무로 하는 공인貢人으로 고종 28년인 1891년부터 1911년까지 20년간에 걸친 일기를 9권의 책으로 남겼다. 
하재일기 원본은 서울대학교 규장각에 도서번호 <古 4655-44>로 소장되어 있으며, 전체 20년의 기록 중에 불행하게도 마지막 아홉권의 앞쪽 3년간은 누락되어 17년간의 기록만이 남아있다고 한다. 여기에 소개되는 「하재일기 1편」은 <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에서 2005년 12월 30일에 펴낸 책으로 1891년 일 년 동안의 일기만을 번역하여 첫 권으로 내놓은 것이다. 이 책은 총 553페이지 분량으로 원본의 초서체 복사본 170페이지, 정자체본 111페이지, 한글 번역본 272페이지로 구성되었다.
다음에 소개되는 내용은 <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박은숙 연구원의 내용을 기본으로 삼은 한편, 필자가 도예 전문가인 동시에 지 씨가 태어나고 일하며 수없이 다닌 길목인 광주군에서 태어나 자란 사람으로서의 느낀 점까지를 첨부하여 책의 내용과 그 중요성에 대하여 말하고자 한다.


하재의 직책과 인간관계
하재는 사옹원의 분원에 속하여 공무를 담당하는 사람이다. 1년 중 반은 서울 인사동 근처의 여관에서 숙식을 하면서 현재의 경기도 광주시 분원리 도요지를 수시로 오가며 서울 관청과 종로 도자기 가게로부터 주문을 받아 납품을 성사시키는 일을 주 임무로 한다. 그의 집은 우천牛川, 소내 근방으로서 분원 가마터 근처에서 홀어머니를 모시는 부인과 아들들과 살았다. 집에는 하인을 부리며 농사를 짓기도 하는 중류 가정인 것으로 보인다.
 조상의 묘가 현재의 하남시 상사창동 법화골인 것으로 보아 그 곳이 고향으로 생각되며, 필자가 간단하게나마 조사를 해 본 바로는 아직도 지씨 성을 가진 네 가구가 현존하고 있으며 이전에는 보다 많이 살았다고 한다. 그의 동생 연식과 처남 한필원은 법화골에서 가까운 남한산성에 살았으며 하재의 처갓집은 남한산성 남문 밖이니 현재의 성남 지역이다.

그는 직책상 많은 사람들과 만나고 있으며 권력자로부터 막일꾼까지 각계각층 사람들의 이름이 무수하게 등장한다. 사옹원 관료들, 궁궐 관계자들, 종로와 진고개 시장의 그릇가게를 비롯한 시장 상인들, 분원 공방貢房의 동료와 조직원들, 친척들의 이름 등을 모두 기록하였다.
 또한 내연의 관계에 있는 두어 명의 여인이 나오는데 특히 이인이라는 여인과는 분원 본가에 갈 때마다 수시로 만나며 많은 선물, 특히 수입 명품으로 환심을 사기도 하며 그녀가 아프면 약을 지어다 달여 먹이기도 하는 등 지극 정성을 보인다. 3월 중순부터 보름동안 분원에 있을 때는 거의 매일같이 그녀를 만나 정담을 나누곤 했으며, 꽃 피는 4월 봄 중순에는 가마를 전세 내어 9박 10일 동안 남산을 비롯한 서울 나들이를 시켜 주기도 하였다. 고약한 사실은 분원에 도착하여 부인보다도 먼저 그녀를 만나는 일이 잦고 부인 이야기는 거의 등장하지도 않는다. 후반기에는 이인의 질투가 심하여 일부러 그녀를 멀리 하는 동시에 기생집으로 보이는 장춘헌의 난인이라는 여인과 자주 만나 선물을 주고 정담을 나누기도 한다. 
 
도자 생산에 따른 기록들
일기에는 많은 7언 절구의 창작시를 읊어 정리하였는데 그 중 4월 5일에 지은 <자창요연磁廠窯煙>이라는 제목의 시는 분원의 가마에서 매일같이 주야로 불을 때느라 연기와 불길이 하늘을 뒤덮은 모습을 보면서 모든 도공들이 좋은 도자기를 생산하기 위하여 관요이긴 하지만 마치 자신의 가마처럼 여기며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감동적인 시상으로 읊은 것이다. 이는 도자사에 있어서도 매우 귀중한 시라 하겠다.
 당시의 분원에는 몇 기의 가마가 있었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지씨가 분원에 한 달 이상 머무르는 기간인 3월 16일-4월 18일까지에는 정확하게 5-6일에 한번씩 가마에서 도자기를 꺼내는 장면이 나온다. 이는 분원이 폐쇄 되었다는 1883년으로부터 8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상당히 활발하게 운영되었던 것으로 생각되어 분원의 운영에 대한 연구에 보탬이 될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고 제물포로 수입된 청화 재료인 일본제 코발트를 사기 위하여 일본인 다니가와, 사까이가 운영하는 상점 두 군데를 수없이 허탕을 치면서도 몇 달 동안 드나들며 어렵게 구입하는 장면으로 보아 청화 안료가 몹시 귀했으며 이는 곧 청화백자의 수요가 상당했던 것으로 추측된다. 6월에는 분원의 화공이 타인과 다투어 구속이 되자 그를 석방하기 위하여 대단히 걱정하고 노력하는 것으로 보아 솜씨 좋은 화공의 주가도 높았던 것으로 생각된다.

1월 23일에는 가마 지붕이 쓰러지는 바람에 그 밑에 늘어놓은 날그릇을 몽땅 망가뜨리는 일을 겪는데 상당히 추웠을 것으로 예상되는 겨울에도 도자기 성형을 했다는 사실이 놀랍다. 그 날은 그릇 본을 찍어낼 두터운 판각 장지를 산 대목도 있어 도자기 제작 도구에 대한 귀중한 자료가 등장하기도 한다. 부서진 가마 지붕의 기둥으로 쓸 나무를 베기 위하여 2월에 가서야 허락을 받아내는 일도 하재의 몫이다.
 
담당 관리들의 수탈과 대응
 1883년에 분원이 폐지되었다는 도자사를 통한 지식이 있었지만 하재일기에 의하면 1891년까지도 관요에 대한 지원이 완전히 끊긴 것은 아니고 궁궐과 관청에 도자기를 납품하는 대신 정부로부터 각종 세금 수입 혜택과 운영비를 지원받았으며 시장 판매에 대한 독점권까지 보장받은 것으로 나온다.
그러나 담당 윗사람들은 은근히 뇌물을 원했으며 이에 응하지 않으면 협박까지 일삼는 통에 수시로 도자기, 땔감, 돈으로 바치기도 하였다. 때로는 납품기일을 어기거나 견본품보다 못한 기물로 납품을 하면 질타를 받거나 퇴짜를 당하거나 가격을 깎기도 한다. 이에 지 씨는 울분을 이기지 못하고 상궁에게 퇴짜 맞은 그릇을 발로 차서 깨뜨리기도 하였다. 8월에 상일동 이 참판은 묘지석을 6일 만에 구워오라고 무리한 요구를 하는 경우도 있다. 모두가 도자기 일의 특성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 때문에 생겨난 일로서 지금이나 크게 다르지 않다.

 

도자기의 종류와 생활용품 물가
일기에는 분원에서 주문, 생산되는 각종 도자기의 이름과 수량, 쓰임새 등이 적지 않게 기록되어 있으며 당시의 의식주에 필요한 갖가지 물품과 수선공임에 대한 가격 그리고 일본이나 중국에서 수입된 물품들까지 소상하게 기록되었다. 따라서 도자기의 가격과 타 생활용품과의 가격 비교도 매우 흥미로운 부분이다.

 

글 박순관 도예가

 

<본 사이트에는 일부 사진과 표가 생략되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월간도예 2008년 4월호를 참조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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