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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9.01월호 | 작가 리뷰 ]

외고산 항아리를 닮은 젊은 옹기장이-허진규
  • 편집부
  • 등록 2009-06-13 11:52:34
  • 수정 2015-05-12 01:34: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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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곽경재 KBS울산방송국 프로듀서


 흔히 사람은 오랫동안 함께 해 온 대상을 닮아 가는 경향이 있다. 이렇게 서로 닮아가는 현상을 심리학 용어로 ‘싱크로니 경향’이라고 한다. 젊은 옹기장인 허진규(44)를 처음 대하는 사람들은 그의 외모를 보고 한 눈에 옹기와 닮았다고 말한다. ‘영남옹기’의 특징인 적당한 넓이의 어깨선과 당당한 동체 라인은 어딘가 허진규의 외모를 연상케 한다. 강원도 옹기는 어깨선이 좁고 동체가 날렵해서 키가 커 보이고, 동체 선이 어깨선에 비해 부푼 형상의 호남 옹기는 상대적으로 키가 작고 뚱뚱해 보이는 것이다. 어디 이 뿐인가. 그의 모나지 않은 성격마저도 소박한 옹기의 이미지와 크게 어긋나 보이지 않는다. 울산의 한 옹기장인과 대상인 옹기사이에서도 ‘싱크로니 경향’이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옹기장 허진규. 그의 고향이자 공방이 있는 곳은 국내 최대의 옹기 집산지로 알려진 울산광역시 울주군 온양읍 외고산리 옹기마을이다. 1905년대 초, 6.25전쟁이 끝나면서 경북 영덕군의 옹기장인들이 현재의 옹기마을에 하나 둘씩 옹기굴을 세우면서 자연스럽게 전국최대의 옹기마을이 형성됐다. 비록 지금은 쇠락했지만, 한 때 이 마을에서는 400명의 옹기장인이 있었다고 한다. 딸린 식구를 포함하면 대략 2000여명, 그 규모가 어떠했는지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그가 태어나던 해인 1960년대와 성장기인 1970년대의 옹기산업은 옹기 역사상 최대의 전성기를 맞이하고 있었다. 옹기의 대량 소비도시인 부산과 울산에 인구가 증가하면서 생활용기였던 옹기는 불티나게 팔려 나갔던 것이다. 상수도 시설이 열악했던 당시의 도시환경에서 옹기는 식수의 저장용기로, 쌀독으로, 심지어 재래식 화장실에까지 한마디로 없으면 안 될 생활필수품이었다. 당연히 옹기공방의 최고 기술자인 물레대장은 가장 유망한 직업 중에 하나로 인식되던 시절이었다. 당시 물레대장의 한 달 품삯은 면서기의 세배 - 물론 지금은 결코 아니지만 - 정도였다고 하니 그 인기를 실감케 한다. 허진규의 부친도 한 때는 전도유망한 옹기장인이자 옹기사업가로 활동하고 있었다. 이런 환경은 허진규로 하여금 일찍 옹기에 눈을 뜨게 하는 중요한 계기가 됐다.

옹기장 허진규는 자타가 공인하는 ‘영남옹기’의 계승자다. 옹기에도 지역색이 있느냐고 묻는다면 당연히 ‘그렇다’이다. 교통망이 지금처럼 발달되기 전까지만 해도 전국의 옹기는 각 지역마다 뚜렷한 지역색을 가지고 있었다. 지역의 독특한 기후와 환경 속에서 저장 식품을 잘 보호할 수 있도록 적합한 모습으로 진화돼 온 것이다. 그러나 도로의 확충과 수송수단의 발달, 옹기 산업이 대량생산 시스템을 갖추면서 옹기의 고유한 지역색은 점점 퇴색되기 시작한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영남 전통 옹기의 보존과 기술의 계승은 시대 조류에 편승하지 못하는 멍청한 짓과 다름이 없었다. 그는 당시의 옹기 장인들과 마찬가지로 초등학교 졸업 무렵부터 옹기를 배우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부친의 공방에서 일을 배웠지만, 제대로 해보겠다는 의욕에 마을에 있는 다른 장인 아래서 본격적인 옹기수업을 받는다. 당시의 옹기공방은 20여명의 도공들이 철저한 분업으로 작업을 하고 있었다. 옹기에 처음 입문하는 도공에게는 당연히 청소나 공방정리 같은 뒤치다꺼리가 맡겨졌다. 이른 아침부터 시작되는 옹기 작업이 원활하게 진행될 수 있도록 흙을 수비하고 타래를 뽑는 일도 당연히 자신의 몫이었다. 이런 과정이 10여년, 그 공방을 거쳐간 수많은 물레대장들로부터 틈틈이 영남옹기의 기술을 전수받게 됐고, 20대중반에 높이 1미터가 넘는 영남대독을 자유롭게 성형하기에 이른다.

옹기의 성형방식은 오랜 시간동안 각 지역 옹기장인들의 손에서 손으로 전수된 것인 만큼 어떤 지역의 방식이 더 우월하다고는 말하기 어렵다. 하지만 영남옹기의 성형 방식은 넓은 판을 쌓아 붙여서 제작하는 호남옹기와는 크게 다르다. 영남옹기는 지름 6~7cm정도의 점토 타래를 3m정도의 길이로 늘려서, 차곡차곡 쌓아 올린다. 이 때 타래를 쥐는 손과 물레는 돌리는 발의 미세한 움직임, 온몸을 활용하는 균형감각, 모든 것이 머리가 아닌 몸으로 익혀야만 성형이 가능한 기술인 것이다. 어느 정도 타래를 쌓아 올려 린 후 수레와 조막으로 두드려서 항아리 형태를 만들고, 안 건개와 바깥 건개로 표면을 매끈하게 다듬는다. 이런 성형기법은 토기의 출현 이후 지구상에 등장한 어떤 기법보다도 신속하게 큰 기물을 성형할 수 있다는 점에서 국내외에서 큰 주목을 받고 있다.

 

<본 사이트에는 일부 내용이 생략되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월간도예 2009년 1월호를 참조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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