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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8.04월호 | 특집 ]

한국도예 미래를 위한 원로도예가의 가르침 - 천한봉(千漢鳳)
  • 편집부
  • 등록 2009-06-13 11:41:50
  • 수정 2009-06-13 12:26: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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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진정한 도공은 고행과 인내로 탄생된다

인터뷰를 위해 아침 일찍 서울을 떠나 경상북도 문경으로 향했다. 방금 작업을 마친 선생은 피곤한 기색 없이 인터뷰에 응했다. “낮 시간에는 손님들이 많이 찾아와서 매일밤 12시에 일어나 아침 9시까지 발물레를 돌려 그릇 빚고, 굽깎는 일을 합니다. 저녁 8시쯤 잠들고 4시간만 자면 충분합니다. 같이 일하는 젊은 친구들이 힘들어하죠.” 선생의 요장(문경요)에는 지금까지 총 40여명의 제자들이 그의 가르침을 받기위해 거쳐 갔다. “도자기는 누구든지 만들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재능이 많은 사람도 있지만 덜한 사람도 있지요. 그러나 손재주가 많은 사람은 도자기를 배우면 헛된 장난을 많이 해요. 돈에 눈멀어 남의 작품을 모작하는 경우도 있지요. 그러나 자신의 뛰어난 재능을 다스리지 못해 결국은 다른 일로 빠져나가지요. 오히려 인내를 갖고 오랜 기간 고생하며 포기 않고 열심히 한 제자들은 결국 도예가로 성공합디다. 배움을 얻기 위해 작업실에 찾아오는 이들에게 1년간은 흙을 못 만지게 해요. 사람 됨됨이를 보기위해 장작패기, 밭일, 흙 나르는 일만 시켜요. 그러면 재주 좋고 똑똑한 친구들은 얼마못가 포기하고 나갑니다. 하지만 진득하게 남은 제자들은 고행을 참고 견디면서 성실히 배웁니다. 그러면 배움을 마치고 나가 진정한 도예가로 살아남죠. 요즘 젊은 도예가들은 제가 겪은 어려움과 비교하면 너무 편해요. 기계도 좋고 재료도 좋고 손쉽게 사용할 수 있으니 편하게만 작업하려고 하지요. 매일 목물레만 돌리고 장작가마만 때는 저와는 다르죠. 제자들 내보낼 때 ‘네가 노력한 것만큼의 결과가 되돌아오는 것이니 편하게만 지내려 하지 말라.’고 해요.” 진정 도공다운 스승의 가르침이다.
첨단시대에 전통을 고수하는 도공의 입장에서 바라보는 세상이 궁금했다. “내 나이 일흔 여섯인데 아직도 우리도예문화에 어떻게 기여할 수 있을까 고민을 많이 합니다. 전통에 대한 고민입니다. 과거에 비해 도공들에 대한 지원 명장, 문화재, 기능한국인 제도 등이 지원되면서 많이 좋아졌어요. 하지만 훌륭한 기능공이 더 많이 양성되었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저는 평생을 흙을 만졌고 흙이 이만큼 살게 했습니다. 우리도공이 만든 막사발이 일본으로 건너가 국보가 됐지만 우리지명을 따고 불려지고 있지 않습니까. 그것을 지금까지 이어올 수 있는 것에 감사할 따름이죠. 그래서 제가 가진 것 모두 후세들에게 다 남겨주고 가고 싶어요. 지금 제 작업장에 20대의 대학 갓 나온 젊은 친구들이 배우고 있지요. 기특해요.”
최근 찻그릇의 인기는 어떤지 궁금했다. “1960년대부터 일본에 진출해서 일본사람들에게 찻그릇 잘 팔아먹었습니다. 이제는 일본도 생활패턴이 현대화 되면서 달라지고 있어요. 격식이 까다로우니까 다도 인구가 줄고 있지요. 다행인 것은 지난해 10월에 경상북도 도청에서 문경 출신 명장 3명을 위해 영국 런던에서 전시를 마련해 참석했는데 찻그릇 반응이 너무 좋았어요. 영국인들이 찻사발에 홍차를 담아먹으면 맛이 좋을 것 같아 갖고 싶다는 반응이었지요. 또 한 번은 중국 이싱에서 열린 전시에 참여했는데 관심이 높았어요. 중국은 본래 차문화가 대중화 돼있었기 때문에 또 다른 수요가 있다고 보여집니다. 현재 중국에는 자사호라는 명품 찻그릇이 있지만 차 맛을 높이는 한국적인 아름다움이 담긴 찻그릇도 인정하게 될 것”이라며 앞으로의 찻 사발 시장에 대한 변화를 내다보고 있다.

 

천한봉은 1933년 생으로 1946년에 도예에 입문했다. 1995년 대한민국 제95-19호 도예명장과 2006년에는 경상북도 무형문화재보유자, 노동부 기능한국인으로 선정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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