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광주 수양리 산자락 위에 황토벽의 긴 건물은 선생의 살림집과 작업장이 함께 있는 곳이다. 집안으로 들어서자 선생은 오랜만에 스승을 찾아온 옛 제자와 담소를 나누고 있었고 우리는 자연스럽게 동석했다.
1960년대 대학도예교육에 대한 회상이 시작됐다. “당시만해도 학교에서는 이론만 배우고 방학이면 선생과 학생들이 함께 지방 요지를 찾아다니며 도자기를 배웠지요. 해외유학파들이 복귀하면서 1970년대부터 활발해졌어요. 공모전에서 도예작품이 상을 받기 시작한 것도 이때 쯤이지요.” 당시 관주도로 열리는 국전과 상공미전 외에 동아공예대전에서 다수의 도예분야 수상작이 두각을 보이며 미술계 안에서 도예분야의 존재가 알려지고 입지를 넓히게된 것이다. “아마도 1980년 초반이지요. 단독적인 도예공모전이 서울 신문사 주최로 시작됐어요. 당시 이 공모전은 갑작스럽게 일어난 엄청난 변화의 바람이었어요. 공모전에서 수상한 것을 기반으로 도예전공 시간강사들이 전임강사(교수)로 진출하기 시작 한 것이죠. 그리고 몇몇 대학에서 도예실습시설을 마련하기 시작하면서 더 이상 지방요지를 찾아다니지 않아도 됐었지요.”
학창시절 실습기자재에 대한 절실함을 경험한 그는 요즘 젊은 도예가들의 작업방법에 대해 지적한다. “대학에서 전공을 해 졸업한 도예가들이 전기가마에서 쉽게 작품을 구워내고 있는 행태는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스스로 가마 온도를 조절하고 고온의 불 속에서 일어나는 변화를 위해 도전하는 자세가 부족한 것 같아요. 물론 공방운영을 통해 생계를 유지하는 이들에게는 연료비 절감과 파손율 감소에 대한 이유가 있어 이해되지만 도예작품을 만들며 활동하는 이들은 그래선 안되죠. 도예교육시설에서도 가스가마의 사용은 도예의 본질인 흙과 불의 요변이라는 원리에 대한 교육적인 측면으로 꼭 필요한 것입니다.”
현재 교육의 전방에 서 있는 교육자들을 향한 선배 교육자로서의 자책과 바램이 이어진다. “당부하고 싶은 것은 교육과 작품은 별개라는 생각을 가졌으면 하는 것입니다. 교수가 꼭 작가이어야 한다는 법은 없다고 생각해요. 이것이 선진국과 다른 점이지. 한국의 대학교육 실정은 교수가 팔방미인 노릇을 해야 살아남는 형태입니다. 도예 교육자는 기술적인 부분을 세심하게 지도하는 역할을 하면 되는 것이데, 과거에는 작가 인프라와 교육자의 인프라가 부족했기 때문에 두 가지의 역할을 다해내는 사람이 필요했지만 지금은 그런 시대가 아니잖아요. 또 한 가지는 교수 스스로 자신의 작품을 흉내내거나 자신의 작품추구 경향을 따르는 학생에게만 좋은 점수를 주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예술적 소양을 키우기 위해 다양성을 인정하고 좋은 재능을 발견해 키워내는 것이 올바른 교육자의 역할인 것이지요.”
선생이 가진 조형예술의 개념은 도예분야에 대한 자긍심으로 발현된다. “조형예술이라는 것은 절대적인 것이 없습니다. 공모전이라는 제도 안에서 순위가 매겨지기도 하지만 그 결과에 따른 상급이 예술의 절대적 표본이 될 수는 없는 것이지요.” 선생은 청년 도예가들에게 “개성있는 조형미를 창조하고 재료의 충분한 연구를 통해 도예가로써의 자질을 갖춘 멋진 도예가들이 많이 나와 주길 바란다."고 전한다.
권순형은 1929년 강릉에서 태어났다. 1955년 서울대학교 응용미술과를 졸업하고 1959년 미국 오하이오주 클리브랜드 미술대학에서 도자기를 수학했다.
1994년 대한민국 예술원상 수상했으며 1960년부터 1994년까지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교수로 재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