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철주 선생을 만나기 위해 경기도 이천의 동국요를 찾았다. 동국요의 풍경은 언제나 한결같다. 단층의 ‘ㄱ’자 건물은 소박하고 단아하다. 사무실 작은 문을 열고 들어서니 오래된 책상에서 손수 글 정리를 하시는 선생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돌이켜보면 청자를 연구해온 세월동안 나름대로 다른 사람들이 생각하지 않은 것들을 시도하기 위해 노력했다고 생각해요. 요즘 도예가들은 너무 쉽게 흙을 접하지요. 하지만 적어도 청자를 만든다면 청자태토에 대한 연구가 먼저 돼야 하는데 그렇지 않아요. 힘든 길을 걷고자 하는 것이 싫은 것이겠지요. 예술품에는 개성이 담겨야 하는 것인데...” 첫마디를 마치고 유난히 긴 숨을 내쉰다. 아마도 지난해 미국 스미소니언박물관에 전시 소장된 자신의 작품 「박지지구무늬항아리」의 복제품이 최근 서울 인사동 한 전시장에서 다른 작가의 이름으로 버젓이 전시된 일 때문인 것이었다. 복제품을 내놓은 도예가가 과거 선생의 요장에서 수년간 일을 하고 전남 강진으로 내려간 이란다. 평생을 연구해온 자료를 모아 실혈을 기울여 만든 두꺼운 도록이 바다건너 미국의 한 박물관에서는 최고의 작품으로 평가돼 전시, 소장되는 반면 같은 공기를 마시며 숨쉬고 있는 주변에서는 그 도록의 작품사진을 베끼기에 바쁜 어이없는 현상이 우리 도예계의 일면이라는 생각에 안타까운 마음이다. 그러한 이유에서인지 방철주 선생의 동국요는 매해 열리는 지역도자기축제에 불참하고 있다. 주변에서 “사업적인 마인드가 너무 없으신 것 아니냐.”라는 소리도 들리지만 원로 도예가로써 본이 되고자 하는 선생의 인성이 욕심을 가로막는다.
선생은 그간 자신의 요장에서 일을 배우고 함께 했던 이들에게 모든 재료를 지원하고 자료를 공개하며 자신의 청자색보다 더 좋은 색을 만들라고 격려했다. “이곳을 거쳐 간 이들 중 유난히 자기개발에 욕심이 많았던 친구들은 지금도 애착이 가요. 하지만 건실하지 못한 도예가로 활동하는 경우도 있지요. 남의 것을 모작하고 다른 동료를 회유해서 손을 빌려 만들어낸 작품을 자기 작품인양 내놓기도 하지요.” 흙과 불에 정신을 담아 작품을 만들어내는 도예가로써의 도덕적 양심에 대한 지적이다. “개인 요장과 공방을 하는 도예가들 중에는 축제나 판매행사에서 작품 혹은 상품이 대량주문 되면 주변의 다른 요장에 하청을 주고 그 요장이 또다시 재하청을 주는 경우가 만연하고 있어요. 구매자는 그 사실을 모르고 구입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다른 시각에서 보면 ‘사기죄’가 되는 것이지요. 또한 대량공장에서 만든 초벌기물을 사다가 완성품을 만들어 자기 요장에서 만든 작품이라고 하는 경우도 많이 있지요. 이것은 전통도자의 가치를 지속적으로 하락시키는 원인입니다. 하청에 재하청을 하는 과정에서 복제품들이 양산되는 것이지요.”
“청자도예가라면 진정으로 자신만의 청자다운 작품을 만드는 것에 모든 것을 내어 맡겨야 할 것입니다. 남이 뭐라고 하든지 내 갈 길을 가겠다는 확고한 신념이 있어야겠지요. 청자도예가가 되려는 후배들에게는 가장 먼저 겸손한 인성을 갖추고 청자다운 색을 만들기 위한 노력과 좋은 색을 볼 줄 아는 실력을 키우라고 전하고 싶습니다.”
방철주는 1922년 서울 출생이다. 1967년 전통도예 작도연수를 시작해 1971년 경기도 이천에 동국요를 설립했다. 1979부터 1986년 <한일문화친교전>, 1984년 <원로작가도예전> 등에 참여했다. 1997년에는 대학요업총협회 제품상을 수상 했다. 그의 박지지구문항아리는 2007년 6월부터 미국 스미소니언박물관에 영구 전시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