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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7.09월호 | 뉴스단신 ]

중국의 교태문과 일본의 근대연리문
  • 편집부
  • 등록 2007-10-18 17:28:50
  • 수정 2008-12-26 10:35: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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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교태문과 일본의 근대연리문
글+사진 조일묵 도예가·미술학 박사

中國
중국의 연리문을 교태문絞胎紋이라고 하는데 그 의미는 색이 다른 흙을 새끼줄과 멍석문양 같이 직조된 문양을 일컫는 말이다.[사진 1] 중국의 교태문은 당대唐代부터 나타나기 시작하여 송대宋代에 이르러 발전의 극치를 이루었고 원대元代에 이르러 쇠퇴의 길로 들어섰다. 그러나 중국에서조차 교태문의 기원이나 기법, 생산되었던 장소 및 시대적 구분은 소수의 학자들만이 초보적 연구에 그치고 있는 현실이다. 그 이유는 실물자료의 결핍이 연구의 전개와 심도에 걸림돌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당대 교태도絞胎陶는 국력의 강성과 더불어 문화도 큰 발전을 이룬 시기에 당삼채唐三彩와 같이 출현하였다. 그 중에서 당나라의 교태도는 서남아시아와 실크로드를 통해 많은 교역이 이루어졌던 시기에 서역에서 들어온 유리그릇의 영향을 받아 제작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당대 교태도는 베개와 접시, 삼족 접시, 발鉢, 합盒, 잔盞 그리고 기마용[사진 2]이 발견되었다. 그 중에서 베개가 많이 발견되고 있는데 교태문 베개는 형태상으로 분류할 때 장방형[사진 3]과 여의주형如意珠形[사진 4]의 두 종류가 있다. 장방형의 베개에서는 좌우 대칭형과 사방연속 문양이 베개 전체를 이루고 있다. 베개의 위 상단에 교태문을 한개 ,두개 또는 네 개를 배치하고 대칭형의 문양을 계획하였다. 중앙에 한 개의 문양을 배치한 베개는 오각형 또는 육각형의 대칭문양으로 나타난다. 그 중에서 마름모꼴 문양에서는 사방연속문양이 가장 많이 발견되는데 이문양은 당대 유행했던 문풍지 문양의 형식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 그 문양의 배경을 살펴보면 사방연속 무늬를 문에 오려붙이면 잡귀와 악귀가 문으로 들어오는 것을 막는다는 주술적 의미와 여성의 폐쇄적 사회 속에서 바깥 세상과의 차단의 용도로써 유행했던 패턴Pattern이었다.
교태문 베개가 유행하게 된 배경에는 중국의 하남河南지역이 습기가 많고 무더운 지역으로 도자베개가 시원하고 끈적이지 않는 장점을 갖고 있어 귀족사회의 생필품으로 많이 사용되었으리라 추정된다. 오각형은 꽃의 형상을 이미지화시킨 교태화문絞胎花紋으로 여성용으로 제작된 것이며 육각형은 거북의 등껍질을 이미지화시킨 것으로 무병장수無病長壽의 도교道敎적 사상을 담고 있다. 여의주형 베개문양을 살펴보면 전체 면에 교태문을 시문하지 않고 주제가 되는 부분만을 상단에 배치시키고 그 주변의 다른 공간을 인화문으로 시문하였다. 문양의 구성을 살펴보면 한 개의 큰 꽃을 중앙에 놓고 양옆에 세개의 작은 꽃을 배치한 것과 두개의 큰 꽃을 중앙에 배치하고 그 사이에 작은 꽃 두개를 배치하는 대칭의 형식을 하고 있다. 상해박물관上海博物館소장[사진 5]의 베개의 밑 부분에 두가화침杜家花枕이라 새겨져있다.1) 당대의 교태도의 제작방법은 밝은 색상의 백자토와 철분이 많이 함유된 자색토를 여러 층을 반복으로 겹쳐 쌓아 직선적인 문양을 구부려 꽃잎문양이나 여러 패턴을 만든 후 얇게 잘라내어 미리 만들어진 기물에 부착시키는 기법이었다.
교태 기물絞胎 器物의 생산은 공현황치요恐顯黃治窯 등 전문적인 제조공방이 있었고 분업화 작업으로 제조되었으리라 여겨진다. 당대에 이미 확인된 교태문 표본의 요지窯址로는 하남河南의 공현요恐顯窯, 자계상림호월요慈溪上林湖越窯, 산서山西의 혼원요渾源窯가 있는데 그 중에서 공현황치요恐顯黃治窯가 가장 뛰어 났으며 수량이나 품종의 다양함과 오랜 번조 역사를 갖고 있다.
당대교태唐代絞胎와 당삼채唐三彩는 모두 고령토를 사용하였는데 번조 온도에 따라 소지색素地色이 다르게 나타난다. 흰색에 핑크색이 비치는 것으로 보아 대부분이 저온 황유, 녹유와 삼채유 등 유약을 입혀 저온 번조한 것들이 일반적인 것으로 보인다. 주요 형태로는 당삼채가 부장품인데 비해 교태자기는 귀족의 생활용품으로 사용되었기 때문에 지금까지 남아있는 수가 매우 적다.  
이 베개들은 귀족들이 사용했을 것으로 확실시되며 잠자리를 편안하게 해준다는 주술적 의미가 포함되었을 것이다. 교태 기물로는 접시류가 가장 많이 발견되는데 문양의 형식[사진 6]은 궤자 모양으로 굽은 무늬, 둥근 자수무늬가 있다.  
교태토의 색깔은 흰색, 갈색, 검은색의 세가지가 있다. 흰색과 갈색을 꼬거나 흰색과 검은색을 꼬는 것이 있으며 세 가지 색이 얽힌 것이 있는데 아주 정교하고 섬세한 결이 보인다.
오대五代의 혼란한 정국에서 송宋나라의 통일은 여러 국면을 변혁시켰다. 특히 경제에서 도자기의 수출로 인하여 많은 도요지가 생겨났다. 분업이 이루어져 생산에 혁신이 이루어졌고 또한 상업적 사회로 자연스럽게 전환되었으며 도시의 발달과 자본가가 생겨나는 계기가 되었다. 교태도자도 이시기와 때를 맞추어 네개의 산지에서 북방의 여러 지역까지 확대되었다. 
이 당시 교태문 제작방법이 다양해져 물레를 이용해서 성형하기도 하고, 판 조각으로 잘라 붙이는 부착 기법과 슬립Slip을 기면에 부어 문양을 번지게 하는 마블링기법 등 다양한 기법이 등장한다. 이렇듯 반복적인 과정을 거쳐 만들어진 도자기는 기물의 표현에 각기 다른 여러 가지 문양을 나타내고 있다. 송시대 교태문의 특징은 크게 두 종류로 파악되는데 하나는 각각 다른 색의 흙을 새끼줄처럼 꼬아서 생기는 멍석 무늬와 대나무 소쿠리의 무늬와 같은 격자무늬가 많이 나타난다.
이러한 정밀하고 아름다운 문양은 금나라와 원나라의 이민족이 통치하던 시대에 와서  많은 변화를 겪게 된다.
금金나라와 원元나라의 교태는 송宋나라의 교태를 모방하고 있으나 교태의 패턴이 산만해 대리석 무늬Marble와 비슷하다. 기종器種은 다양해졌으나 작고 조잡해져 대중의 관심에서 멀어지는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 그 이후 중국의 교태도는 거의 찾아보기 힘들고 전통도자에서 극소수의 문양만이 나타나고 있다.  

일본의 근대 연리문 도자 
일본의 연리문은 모모야시대桃山時代에 찻잔에서 미세하게 나타났으나 넓게 확산되지는 못하였다. 임진왜란壬辰倭亂 이후에는 지역별 도자산업의 육성으로 도자의 기술과 경제 발전을 가져오게 되었다. 특히 근대에 이르러 아리타有田도자기의 유럽 수출을 통해 도자기에 대한 경제적 이익으로 생겨난 거대자본은 일본의 자긍심을 갖게 되는 계기가 되었으며 그것은 메이지유신明治維新의 자본으로 연결되어진다. 메이지유신은 일본의 정치, 사회, 예술의 모든 분야에 새로운 전환의 계기를 만들었으며 그것은 외국의 최고를 모방하자는 일본의 범 패러다임의 운동이었다.
도자기에서도 중국과 한국의 청자를 연구하였고 연리문 또한 함께 연구되었다. 이 때 초기 연리문은 Suwa Sozan諏訪蘇山에[사진 7] 과자발 석천현입菓子鉢 石川縣立미술관소장2) 의해 연구가 시작되어 가와이간치로河井寬次郞3)  다께우찌 세이지로武內晴二郞  마쯔이 코세이松井康成의 연상수練上手로 이어지는 연리문의 계보와 함께 많은 연구가 이룩되었다.
일본에서는 연리문을 네리아게데練上手와 네리코미練りみ, 우즈라手/うずら 등 여러 명칭으로 불리며 도자기법에 대한 관심을 높여 갔다.
우즈라는 백색과 적색점토를 따로 잘 반죽하여 각기 요철판을 이용하여 일정한 두께로 잘라 상판土板을 만든 후 다른 색판을 부쳐 세로로 잘라 붙이는 방법과 백색도판과 적색도판을 서로 겹쳐 쌓아 밀착하게끔 누른 후에 이 덩어리를 1.5~2㎜정도의 둔도鈍刀로 자르면 깃털 같은 문양[사진 8]을 얻을 수 있다.
이렇듯 일본의 연리문은 19세기말 외국의 기법을 많은 연구를 통해 자국의 전통기법으로 만들었고 그것을 이어가는 노력을 반복한 끝에 많은 연리문의 기술적 기초 자산을 얻게 되었다. 그 이후 1960년대부터 현대 도예 작가 마쯔이 코세이松井康成는 중국의 당·송의 교태문과 고려의 연리문을 기초 삼아 40년에 걸친 연구 끝에 일본의 연리문Neriagede/練上手기법을 유럽에 널리 알리는데 기여하게 된다. 따라서 그 기법을 네리에이쥐 즉 일본의 연리문을 영어 표기로 그대로 발음하여 네리에이쥐 기법으로 쓰게 되었다. 또한 일본에서는 이 기법을 구사하는 도예가들 중 최고의 작가를 인간국보人間國寶로 정하고 있으며 마쯔이 코세이는 타개 이후 인간 국보로 확정되었다.
지금까지도 일본의 연리문 기법은 기술적 독창성을 지키며 전통의 뿌리를 내리고자 많은 노력이 이어지고 있다. 
 다음호에 계속


필자 조일묵은 단국대학교와 동대학원을 졸업하고 미술학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김석환 선생의 사사를 받았으며 총 10회 개인전을 가졌다. 현재 서울시립미술관과 단국대학교에 출강중이며 경기도 양평에서 강하도방을 운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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