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30. ~10. 20. 성남큐브미술관 반달갤러리
사-잇길에서 나를 찾다.
고혜숙의 작품 제목인 「사-잇길 Inbetween」은 그의 작업의 정체성과 지향점을 잘 압축하고 있다. 그는 전통과 현대, 물질과 정신, 사람과 자연, 사람과 사람의 관계 사이를 주제로 작업하고 있다. 그의 작업의 주제이자 추구하는 방향이 무엇인지를 파악하기 위해 한국의 전통에 대한 해석과 관계의 성찰이란 두 가지 관점으로 고찰할 필요가 있다. 먼저 전통의 해석을 통한 현대적 조형 언어의 탐구란 문제는 그의 경험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미술대학에서 전통적인 방식의 조소彫塑 교육을 받은 그는 대학원을 졸업한 후 1979년 프랑스로 유학을 떠났다. 그는 파리 8대학 조형예술과에서 수학하였으나, 파리국립미술학교에서 샤르팡티에Michel Charpentier 교수를 만났을 때의 일은 그에게 잊을 수 없는 기억을 남겼다. 그가 준비해 간 포트폴리오를 보여주자 샤르팡티에 교수는 단호하게 “방향이 완전히 틀렸다”고 말했다. 실제로 그의 포트폴리오에는 대학과 대학원 재학 중 열심히 했던 인체 구상조각 자료가 수록돼 있었다. 샤르팡티에는 자기 스튜디오에서 작업해도 된다고 하면서 그에게 “한국적인 것을 하라”는 충고를 잊지 않았다. 그 말이 고혜숙에게는 두고두고 풀어야 할 숙제가 되었다.
프랑스에서 귀국한 후 ‘보이지 않으면서 현존하는 것’을 제목으로 1987년에 가진 첫 개인전을 시작으로 그는 줄곧 추상조각을 발표했다. 첫 개인전에서 발표한 작품은 섬돌을 소재로 한 추상표현적인 형태를 띤 조각이었다.
그는 1990년의 개인전에서도 홍도나 흑산도에서 보았던 기암괴석을 석고로 직조한 작품을 통해 자연을 재현한 것이 아니라 자연과 일체가 된 조각을 발표했다. 이 작업은 자연과 인간의 관계를 성찰하고자 했다는 점에서 뒤에 나타날 ‘사-잇길’을 예고하는 것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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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혜숙이 빛바랜 문, 낡은 울타리, 오래된 굴뚝 등에서 발견한 시간의 흐름은 시간이 지닌 속성을 잘 보여준다. 그는 시간의 흐름을 석고와 철이란 이질적인 재료의 결합과 석고의 하얀 표면 위에 나타난 얼룩 등으로 시각화했다. 석고에 나타난 얼룩은 다른 석고의 표면을 찍은 것이기도 하므로 원본의 분신alter ego이자 프로타주라고 할 수 있다.
67X40X163cm I Cor-ten Steel, Stainless Steel I 2022 (Left Image)
90X53X250cm I Cor-ten Steel I 2024 (Right Image)
이런 작업은 동판의 표면을 부식하거나 알루미늄판에 드릴로 드로잉 해서 만든 상처 속에 동판 잉크를 넣어 찍는 애쿼틴트나 에칭 기법으로 제작한 원판을 다시 석고로 찍어낸 「흐름-길」에서 볼 수 있듯이 입체와 평면이 여백의 미를 통해 서로 만나는 작업으로 발전했다.
「흐름-길」에서 볼 수 있는 물질에 대한 예민하면서 감각적인 접근은 자연에 순응하고자 하는 작가의 태도를 반영함과 동시에 조각의 경계를 해체하고자 하는 의도도 반영한다. 반면에 버선본은 그가 줄곧 찾았던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을 드러낼 뿐만 아니라 고유의 정서와 미의식을 형상화하는 데 영감을 부여했다.
캐나다 토론토에 삼 년 동안 체류할 때 오래되고 버려지고 잊힌 것에 대한 그리움을 찾던 그는 윤동주가 1936년에 발표한 시 『버선본』을 발견했다. 누나의 습자지와 윤동주 자신의 몽당연필로 버선본을 그리는 어머니로 향한 그리움을 표현한 이 시는 고혜숙에게 전통의 아름다움을 다시 발견하고 깨닫게 만드는 기회를 제공했다.
버선본이든 뒤에 나타날 장독대의 항아리든, 보자기든 다 같이 전통사회의 여성, 특히 어머니의 가사노동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는 대상이다.
윤동주의 시로부터 영감을 받아 제작한 작품으로 2003년 토론토에서 개인전을 열기도 했던 「버선본」 연작이 「흐름-길」의 연장이라고 한다면 꽃담과 항아리 작업은 그의 작업에서 또 하나의 예외에 속하는 것이었다. 한국적 정서에 호소하는 대상을 찾다 자연스럽게 꽃담과 오지항아리를 발견하였으나 용기容器로서 옹기의 형태가 너무 두드러진 문제는 있었다.
전통으로 회귀할 것인가, 전통을 딛고 새로운 내용과 형식을 창출할 것인가 하는 문제 앞에서 그는 흙의 가소성과 불로 구웠을 때 나타나는 질박한 느낌을 적극적으로 활용한 테라코타 연작인 「관계」를 통해 대안을 찾고자 했다. 이 작업은 그 자체로도 흥미로운 것이지만 자기瓷器 파편을 이어붙인 작업을 예고한다는 점에서도 의미를 지닌다.
자기로 만든 기하학적이지만 불규칙한 형태를 이어 붙이는 작업은 한국미를 찾던 그가 마침내 발견한 보자기를 구성하는 헝겊 한 조각 한 조각의 형태로부터 출발한 것이기 때문이다.
「사-잇길에서」 18X32X63cm, 42x14.5X34cm, 53X19x36cm I Ceramic I 2018
정사각형의 형태를 지닌 보자기는 선물이나 예술을 싸기 위한 것으로부터 옷이나 이불을 싸기 위한 것이거나 밥상을 덮는 것에 이르기까지 용도에 따라 크기가 다양하다. 그중에는 화려한 자수를 놓은 보자기도 있지만, 바느질하고 남은 자투리 천을 이어붙여 천의 고유한 색과 질감, 무늬를 활용한 것이 우리가 기억하는 보자기의 일반적인 특징이다. 크기가 일정한 사각형을 이어붙인 보자기는 현대의 기하학적 추상회화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그러나 고혜숙은 자투리 천을 가위로 잘라 형태가 불규칙한 천을 이어붙인 보자기를 주목했다. 조각보의 가장자리에 남아있는 가위질의 흔적인 선이 굽었거나 사선인 형태를 모양 그대로 흙으로 빚어 백자나 청자로 구운 조각을 정렬한 부조 작품은 형태의 구성을 강조한 까닭에 면의 크기와 조밀함 등이 주는 미적 특징을 드러낸다. 그는 이 부조에 만족하지 않고 조각보의 아름다움을 공간 속에 입체적으로 설치하는 방법으로 발전시켰다.
조각보의 한 면은 코르텐강으로 제작된 입체 하나하나는 조각보의 면을 입체화한 것으로서 그 덩어리에 부착된 스테인리스 스틸은 조각보의 가장자리를 결정하는 예리한 가위질을 상징한다. 조각보의 형태를 해체해 삼차원의 덩어리로 확대하여 공간에 놓은 이 작품은 관객들이 각 덩어리 사이에 형성된 통로 사이로 걸어 다닐 수 있도록 설치된다.
붉게 녹이 슨 덩어리는 그가 오래전에 추구했던 섬들이 지닌 토템적 특성을 떠올리게 함과 동시에 공간이란 바다에 떠 있는 섬이나 바위를 연상시키게도 만든다.
그러나 이 공간을 걸으면서 각자 독립된 형태를 연결할 경우 보자기의 구조가 된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은 신선한 경험이 아닐 수 없다. 서로 성질이 다른 물질인 코르텐강과 스테인리스 스틸의 결합으로 구현된 이질적인 만남은 보자기와 현대조각의 만남을 통해 상생의 가치로 상승한다. 여기에서 고혜숙이 줄기차게 추구했던 관계는 상호 이해와 존중에 뿌리를 둔 것임을 알 수 있다.
「사-잇길에서」 50X45X10cm I 고목, wood, 4pieces I 2018
관계의 성찰은 2001년 한국여류조각가회가 ‘사랑’을 주제로 개최한 전시에서 그와 동료 여성 조각가들이 공동으로 참여한 《외국인 근로자, 음지-관심-사랑》에서 중요한 분기점을 맞았다. 당시 고혜숙과 그의 동료들은 성남의 외국인 노동자를 위한 교회를 방문한 후 산업재해로 사망한 노동자의 유해가 그들의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보자기에 싸인 채 선반 위에 놓인 것을 보고 큰 충격을 받았다.
개인적인 감정의 끌림을 넘어서는 관심과 배려야말로 사랑의 실천이란 사실을 깨달은 그는 유해 상자를 싼 보자기를 거대한 크기로 확대하여 관객들이 내부로 들어갈 수 있는 작은방을 만들고 그 앞에 세 개의 모니터와 안타깝게 사망한 외국인 노동자들의 넋을 위로하는 종이(상여) 꽃을 놓고 검은 보자기에 싸인 어두운 방 안에는 이들의 행복했던 시간을 기억하는 사진을 전시했다.
이 작품은 그를 한국에서 부당한 취급을 받는 외국인 노동자를 통해 일제 치하에서 굴욕적으로 당했던 학대와 수탈에 대해 되돌아보도록 이끌었다.
인연을 소중한 가치로 여겨온 고혜숙의 관심은 버선본, 항아리, 보자기에서 볼 수 있듯 여성, 특히 어머니의 삶에 대한 외경으로부터 출발하여 소외된 이웃, 소수자로 향한 관심과 배려로 확대되었다. 그러므로 사잇길은 나와 타자 사이를 연결하는 인연의 끈이기도 하다.
「사-잇길에서」 65X35X6cm I Ceramic I 20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