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자철화포도무늬전접시」 조선시대 17세기. 지름: 18.5cm, 높이: 1.5cm, 굽지름: 11cm
임진왜란이 평정되고 전후의 정치적 사회적 격변기가 시작되는 17세기에 도자기의 모습도 예전과는 다르게 변모한다. 전쟁으로 인한 왕실의 재정 상태는 고갈되어 더 이상 값비싼 청화안료의 수입이 불가능 해지자 대체 안료로 저렴하고 생산이 쉬운 산화철안료를 사용하여 왕실용 도자기를 제작하게 되는데 철화백자의 본격적인 생산의 시발점이 된다.
『광해군 일기』에 “전쟁을 치른 후 연회나 제례용 화준이 하나도 남지 않아 청화안료를 구입하여 번조하려 했지만 현재 사 올 수 있는 길이 없습니다...”라는 대목과 인조16년(1638년)에는 왕실 대례에 사용할 ‘청화용준靑畵龍樽’이 없어서 임시방편으로 다른 의례기를 사용한 기록이 보인다. 이런 상황에서 왕실에서 생산하기 시작한 철화백자는 이전의 청화백자의 기형에 안료만 바꿔진 형태로 제작되기 시작하지만 청화안료에 비해서 그림을 도자기의 몸통에 그릴 때 붓이 잘 나가지 않고 농담 표현이 쉽지 않으며 잘 번지고 휘발성이 강하여 번조과정에서 문양의 일부분이 사라지는 시행착오를 겪게 된다. 그래서 왕실용 철화백자이지만 간략화되고 희화화된 작품이 생산되었고 조선초기의 청화백자처럼 섬세하게 그려진 철화백자는 매우 희귀하다. 사진1의 「백자 철화 포도무늬 전접시」는 17세기 전반기에 제작 된 왕실용 작품으로 경기도 일대의 관요에서 납품된 것으로 추정되는 희귀한 유물이다. 조선 초기의 전접시 형태로 낮고 넓은 굽과 몸통의 주변으로 얇은 전이 둘러져 있으며 굽바닥의 유약은 일부를 제거하고 가늘고 고운 모래 받침을 사용하여 번조하였다. 사진2, 3)
바닥 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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