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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2.06월호 | 특집 ]

토기의 재조명-한국 토기의 문화적 가치
  • 편집부
  • 등록 2003-03-18 18:16:48
  • 수정 2018-02-19 09:4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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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기의 재조명

한국 토기의 문화적 가치

글/사진 이영자 옹기민속박물관 관장

들어가는 말

 토기의 문화적 가치를 말하기에 앞서 먼저 ‘토기(土器)´와 ‘도기(陶器)´에 대한 인식부터 새롭게 변모시켜 나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질그릇으로서의 ‘도기´는 현재 토기와 도기로 나뉘어 쓰여지고 있지만, 토기라는 명칭은 20세기에 들어와서 쓰이는 용어인데 비해, 삼국시대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널리 쓰인 말은 도기였다. 원래 ‘도(陶)´는 가마 안에서 질그릇을 굽는 형상을 문자화한 것으로 도토(陶土)를 써서 가마 안에서 구운 그릇을 총칭하는 말이다. 막연히 흙 그릇을 지칭하는 토기라는 용어는 따로 있는 것이 아니며, 도기 안에 속하는 것으로 도기로 써야 타당하다.(윤용이,『아름다운 우리 도자기』, 학고재, 1996, pp192∼194) 토기 즉, 도기는 더 나아가 조선시대 흑갈유 유약을 입힌 옹기에 이르기까지 함축성 있는 도기 문화로 재인식되어져야만 한다고 본다.

 도기문화는 그 시대의 역사적인 배경과 삶의 질에 따라 나눠진다고 볼 수 있다. 수천 여년전 수렵시대엔 강가에 꽂아 놓기 좋은 빗살무늬와 민무늬 토기에서 시작돼 삼국시대부터 통일신라시대까지 찬란한 문화의 신라도기와 가야도기를 만들었으며 고려의 귀족정치와 청자의 발달로 청자 모양을 본 떠 만든 작은 그릇과 커다란 독들이 다양한 모양으로 만들어져 쓰이게 되었다. 질그릇이라 부르는 고려도기는 생활 용기로써 발전해 나가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조선시대에 와서는 우리의 생활 공간과 건축미의 아름다움까지도 바꿔 놓는 옹기(甕器)로써 도기의 생명력은 거듭나게 되었다.

문화적 가치

 토기 즉 도기, 질그릇 옹기는 우리에게 어떻게 비춰졌을까? 도기는 생활용품으로 등장하기 시작했으나 다양한 문양과 장식, 장송의례(葬送儀禮), 토우(土偶) 등 예술성을 가미해 그 질박함과 함께 고대인들의 삶과 해학의 여유를 엿볼 수 있다. 이는 8,000여 년 전의 세월 속에 많은 문화유산을 우리에게 안겨 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인류문화유산으로서 태고적 가치와 고고학· 미술사적 가치가 있다.

 선사시대 토기에서 수렵과 농경문화를 엿볼 수 있으며 빗살무늬 장식은 생선뼈를 활용한 도구의 사용과 단순한 선의 흐름으로 알아 낼 수 있었다. 미술사적 측면에서 볼 때, 신라와 가야도기의 경우는 비실용적·의기적(義器的)·신앙적 용도로 만들어진 것이 대부분인데, 솔직하고 소박하면서도 뛰어난 조형미를 갖추어 그 특유의 형태와 장식·미감으로 원숙미를 느낄 수 있게 한다. 그러한 반면 고구려의 엷은 회흑색 질그릇은 형태나 색을 통해 견고하고 조용한 느낌을 갖게 한다.

 이는 고조선 청동기시대 무문토기 항아리에서부터 고구려 도기로 계승되고 후에 조선시대 옹기에까지 이른다. 고고학적 가치로의 매장문화 유물은 도기만이 갖는 흙의 우수함을 알려주는 좋은 사례일 것이다. 세골장(洗骨葬)은 동남아시아에서 널리 유행했던 풍습으로 조선시대 유교문화에 까지 이르렀다. 영혼의 안식처로 평생 주인과 함께 해온 유물들은 고스란히 매장되었던 것이다. 석기시대 이래 오늘에 이르기까지 사람들은 유해(遺骸)를 매장함에 있어 피장자(被葬者)와 관련된 물건을 부장하는데, 이 고분유물은 당시의 사람들이 의식적으로 선택하여 부장한 것으로서 이를 통해 사람들의 의식변화를 알 수 있게 된다. 특히 도기의 경우 일반인들이 제작한 것이 아니라 당시의 장인들에 의해 그들만의 기술과 예술적 감성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당시 사회의 조직이나 체계를 짐작할 수 있을 뿐 아니라 당시 사람들의 삶의 일부분을 살펴볼 수 있는 것이다. 예를 들면 옹관의 사용이나 제사용 그릇, 의식용 토기를 통해 당시 사람들의 삶과 죽음에 대한 인식과 장송의례(葬送儀禮) 등을 알 수 있게 한다. 발굴작업을 통해 도기그릇의 출현은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수 천년을 흙 속에서 간직한 그 투박한 자태는 만져 볼 수도 없고 닦아 낼 필요도 없어 눈길로만 닦아주어야 할 소중한 문화유산이다.

식문화(食文化)의 발전을 볼 수 있다.

 원시인들이 강가에서 수렵을 하며 도기를 만들어 모래 위에 꽂아 놓고 썼던 것을 시작으로 농경사회에 접어들어 정착을 하면서 많은 도기를 만들어 쓰게 되었다. 더욱이 갈무리, 저장, 운반 등에 도기가 필요하게 되었던 것이다. 처음에는 수옹(水甕)으로 많이 쓰였는데 지금도 동남아시아 곳곳에 커다란 수옹이 많이 남아 있음을 볼 수 있다. 우리의 식문화와 도기는 점차 그 친분을 더하는데 이는 음식을 조리하고 발효식품으로 발전해 나가면서 더욱더 다양한 형태의 도기들을 볼 수 있다. 간장, 된장, 고추장, 술, 젓갈, 식초 등의 고유한 우리의 음식문화가 더 많은 도기의 발전을 가져온 것이다. 문헌상에서 도기의 사용 흔적을 살펴보면,『삼국지』위지동이전 고구려조에는 “창고는 없지만 집집마다 작은 창고를 갖추고 있는데 그 이름을 부경이라고 하고 그 사람들은 청결하며 잘 저장하고 발효식품을 만들어 즐거워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삼국사기』백제본기 다루왕조에서는 “가을에 곡식이 여물지 않았으므로 백성들에게 개인적으로 술 빚는 것을 금한다(十一年秋 穀不成 禁百姓私釀酒.)”는 기록과, 『삼국사기』신라본기 신문왕조에 “신문왕이 김흠연의 딸을 왕비로 맞이하는데 그 예물로써 쌀, 술, 기름, 꿀, 간장, 포, 젓갈 등을 신부집에 보냈다(三年春二月…金欽連少女爲夫人…米酒油蜜醬 脯 一百三十年)”는 기록이 있어 발효음식을 저장했던 도기의 사용을 짐작할 수 있다. 고려시대의 문헌인『선화봉사고려도경』에는 “백미와 장의 저장고로 대옹을 마련하여 원호 및 구제시설로 이용하였고...(王成長 廊每十間 張 幕設佛像 置大甕貯白米漿復有杯杓之屬…)”라는 기록과 “과일을 저장하기 위해 도기를 땅속에 묻어 보관했을 뿐만 아니라 조미료인 초의 저장으로 이용하였다(其果實栗大如桃…乃盛以陶器埋土中故經歲不損六月亦含桃味酸如酢榛榧最多元)”, “수옹은 도기로 넓은 배에 목은 오그라들었고 그 입이 약간 넓으며...(水甕陶器也 廣腹斂頸 其口差敞…)”라는 기록 등이 남아있다. 조선시대의 기록으로는『용재총화』,『세종실록지리지』,『임원경제지』등의 여러 문헌을 통해 도기의 사용 모습을 알 수 있다. (정병락,『옹기와의 대화』, 옹기민속박물관, 1997, pp.100∼104) 이처럼 도기 또는 옹기는 다양한 먹거리문화를 낳았고 또한 음식문화와 공존하면서 지금까지도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주거 공간 구성과 건축미의 조형성을 엿볼 수 있다.

 식문화의 발달로 도기의 힘은 커다란 공간을 점유하게 되었다. 부엌이나 곳간, 장독대가 바로 그곳이다. 집을 지을 때도 광, 마루, 안방, 건넌방, 부엌을 넣어야만 했고 부엌 뒷곁 양지바른 곳엔 의례적으로 장독대가 있기 마련이었다. 또한 이러한 공간들은 한국 고건축의 미를 한껏 살려주지 않는가? 동선의 넉넉함, 여인들의 눈길 속에 놓아두고 싶었던 소중함, 그리고 기교 부리지 않고 뽐내지 않은 실용성, 이러한 자연스러운 건축의 조형미가 우리 도기의 열정이 아닐까 한다.

노동력의 집중화와 도공(陶工) 양산을 낳았다.

 식문화와 주거문화의 발달로 많은 생산성의 필요에 따라 노동인력이 필요하게 되었다. 노동력의 공유로 가족의 승계나 여인들의 참여까지도 요구하게 되었으며 아름다운 집단 촌락을 이루어 살게 되었다. 점촌·점등·독곳 등의 이름은 지금까지도 남아 있어 옛 도기고을의 유명세를 알려주는 좋은 문화유산이다. 수많은 발길질과 주걱하나로 원심력이 빚어 놓은 도기들은 곧 장인의 힘, 우리의 도공들이었다. 우리의 도공, 독을 빚는 도공의 눈길은 신기에 가까울 정도이다. 이웃 일본이 탐낸 도공들이 아니었던가?

기복신앙(祈福信仰) 문화와 샤머니즘이 나타난다..

 사람이나 동물 등의 모습을 형상화한 토우(土偶)는 그들이 지닌 익살과 해학의 미(美)가 담겨 있을 뿐 아니라 그 안에 담긴 고대인들의 신(神)에 대한 기원(祈願)이나 숭배의 대상으로 쓰여진 경우가 많다. 부장용으로 사용된 대부분의 도기는 영혼을 저승길로 태워 보내는 역할을 한다고 믿어지던 배 모양·오리형·수레형 도기 등이 있어 그들의 샤머니즘을 엿볼 수 있다.

 또한 우리민족은 참으로 독특한 공간을 향유하고 있다. 커다란 궁궐이나 99칸의 사대부 집에서부터 초가삼간에 이르기까지 부엌 뒤꼍 양지바른 곳에 그리 높지 않은 기단석을 쌓고 주위를 정갈하게 정리하고 낮은 담을 쳐서 키재기라도 하듯 나란히 놓아 놓은 항아리들이 있는 장독대이다. 큰 독엔 간장이 익어가고 금줄을 치며 버선본을 붙여 놓으면서 정성스레 닦아주던 여인들의 손길이 억지부리지 않고 가꿔 놓은 장독대 문화로 남아있다. 더욱이 그곳엔 운명적일 수밖에 없는 삶을 정한수를 떠놓고 빌고 또 빌었던 우리네 할머니·어머니의 기복신앙이 신선한 새벽향기 속에 살아 숨쉬는 곳이기도 한 문화공간이다. 적갈색은 잡귀를 물리치며 줄띠는 장수를 뜻하는 의미를 지녔고 비뚤어진 기형도 금이 간 것도 떼워서 쓰는 알뜰함도 여기에 담겨 있다.

한민족의 동질성을 들 수 있다.

 도기그릇을 이용해 빗물을 받거나 물을 떠 나르기도 하는 수옹과 술을 빚을 때 쓰는 술독 등으로 쓰는 것은 세계 어느 나라에서나 가끔씩은 사용되어지고 있다. 그렇지만 우리 한민족처럼 줄기차게 도기 그릇-옹기를 포함해서-을 사용해온 민족은 드물 것이다. 발효식품인 간장, 된장, 고추장, 김치, 식초 등 우리 한민족의 음식문화에서 우리는 동질성을 공유하며 김치문화를 세계에 알리고 있다.이러한 동질의 문화가 남과 북의 갈림길에서 하나로 이어져 나가 연구하고 공감할 수 있는 전통문화로 자리 매김 할 수 있길 바라는 마음이기도 하다.

맺는 말

 그 민족의 문화는 무형과 유형으로 대별될 수 있다고 본다면 토기 또는 도기는 그 두 가지를 다 갖춘 커다란 문화유산이라 할 수 있다. 옛부터 형(形)과 선(線)을 갖춘 유형으로 보는 이들이나 소장가들의 사랑을 독차지 해 왔던 도기이지만, 우리는 짐짓 그들의 주인이었을 무형의 문화적 가치에 대해서는 잊고 있지는 않았는지 반문해 보고 싶다. 삶을 영유하기 위해 끊임없이 만들고 가꾸어 왔던 도기문화는 물줄기가 흐르듯 가늘고 길게, 깊고 폭넓게 모든 영역을 수용하면서 지금까지 우리 곁에서 기층문화의 버팀목이 되어 왔던 것이다. 보면 볼수록 투박한 선이 보이고 손과 손가락이 가는대로 발로 차는대로 무심(無心)한 도공의 숨결이 살아 숨쉬는 그 흙이 짙은 향수마저도 되삭임질하게 하는데, 우리는 굳이 이것을 문화적 가치판단에서만 잣대질 할 것은 아니라고 본다. 흙으로 태어나 흙과 재와 물, 불, 공기까지도 함께 만나 숱한 이야기를 만들어 내고 다시 흙으로 되돌아가는 도기는 우리에게 많은 문화유산을 말해 주고 있다. 바로 이것이 도기 즉, 질그릇·옹기들이 말해 주는 문화적 가치가 아닐까?평소 늘 옹기를 바라보면서 나눈 대화들이다. 이제 도기 그릇을 근간으로 삼아 옹기문화를 이끌어 올릴 때라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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