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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8월호 | 작가 리뷰 ]

흔적, 발견 그리고 파편적 글쓰기
  • 편집부
  • 등록 2015-09-03 18:05:52
  • 수정 2018-01-02 17:2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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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호상

흔적, 발견 그리고 파편적 글쓰기

이호상<흔적·발견>7.1~7.6 가나아트스페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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뮬라이트 반원형 내화판, 혼합재료 90x23xh126cm

 

예술적인 영감이 거처하는 곳은, 우리의 삶 너머의 깊은 외딴 곳이나 광활하게 넒은 특정 저장소貯藏所라기보다는 자신의 삶속일 경우가 대부분이다. 게다가 예술이라는 것의 발원과 형성 그리고 소멸도 우리의 삶 속이다. 예술적 영감은 지루하기 짝이 없고, 혹은 다람쥐 쳇바퀴 도는 듯한 삶의 국면을 전면적으로 바꾸어 신선한 공기가 되기도 하고 깊은 한숨의 상념을 만들기도 한다. 삶을 바라보고 혹은 그것을 ´빗겨´ 새로운 생각을 하는 근원, 그것이 예술적 영감이다. 따라서 예술적 영감의 거처는 바로 나의 옆자리이며, 영감의 결과인 예술행위 혹은 작품도 내 안에서 비롯되어 싹이 트고 발화發花/發話한다. 그래서, 간혹 멀리 바라보고 무언가 갈망하던 눈을 거두어 내 발밑에 시선이 닿는 순간 예술적인 영감이 ´굴러다니는´ 것을 보기도 하고 마른 겨울의 밭에서 펄럭거리는 비닐처럼 도처에 널려있는 것을 발견하기도 한다.

이번 전시는 개인전으로는 퍽 오랜만의 일인 듯싶다. 내 기억으로는, 눈이 빤짝 빤짝하던 어린 시절 재기발랄한 작업으로 전시장을 가득 메운 십여 년 전의 전시 이후로 처음으로 여는 개인전이다. 당시, 작가는 도예가들이 즐겨 쓰는 방식인 물레성형이나 이형주입성형 그리고 판작업 대신에 주사기를 이용하여 면발 같은 형태를 압출해내거나 나무나 철 같은 재료를 자유롭게 이용하여 이야기를 만들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리고는 십여 년이 흘러 다시 전시를 한다. 각종 미술관련 모임들에 가입해 있고 학교에서 미술이라는 것으로 박사학위까지 받았으니 대추나무 연 걸리듯이 한두 점씩 출품하는 전시가 두어 달에 한번 씩은 계속되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에겐 작가의 세 번째 개인전 이후 정확하게는 12년간이 공백처럼 여겨진다. 우선, 그간 작가의 작업을 살펴 볼 기회가 없었다는 것이 첫 번째 이유이고, 이번 전시에 출품할 작품들이 치기어린 어린 시절, 가득차서 뚝뚝 떨어지던 설익은 열정에서 퍽 멀어진 작품들이라는 점이 두 번째 이유이다. 관계의 공백이자 내가 가진 작가에 대한 상상의 공백이다. 하여튼 세월은 가고 사람도 작품도 변해있다. 한잔 기울이며 지난 이야기를 나누는 것으로 해소하기엔 너무나 긴 세월이었고, 그 세월의 끈이 이어지고 다시 그를 만나고 그가 만든 작품을 본다. 세월에는 약간의 소회素懷와 감동이 있다.

작가가 이번 전시를 통해서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발에 치이는´ 것들에서 발견한 담담한 예술적 영감들이다. 사물에 의미를 부여하여 그것을 예술작품으로 바꾸는 방식이라기보다는 삶속에서 발견하고 그것에 인격을 부여하거나, 그것 자체로 ´대체로´ 예술작품일 수 있게 하는 것들이다. 굳이 예술일 필요도 없을지 모른다. 어느 날 문득, 오랫동안 가마에서 도자기를 굽던 내열판이 가진 표정과 질감 그리고 균열들에서 작가는 자신의 얼굴을 보고 혹은 자신이 지속해온 작업의 시간들을 보고 그리고 인생을 느꼈을 것이다. 아마도 깨진 내열판을 가마에서 꺼내어 한참을 보고 또 봤을 것이다. ´도대체 이것은 무엇인가자신이 만든 흙 그릇을 받아내고, 달구어지고 온도와 무게를 견디고, 간혹은 세로로 작업실 구석에 켜켜이 쌓아놓았던 내열판에서 (문득) 자기 자신을 발견한 것은 아닐까? 창발創發/emergence이라는 말이 있다. 문득 어디선가 튀어나오는 창의성 정도의 말인데, 삶에서 지속적으로 축적된 무엇에서 문득 튀어나오는 ´무엇´에 해당하리라. 작가에게 금이 가고 물성이 변한 얼룩지고 깨진 내열판이 창발의 메신저로 주워졌을 것이다. 그리고 ´´ 내열판에서 본 것은 시간을 견디고 지속적으로 변하지만-변하지 않는 자기 자신의 모습이었을 것이다. 가마도 아니고 유약과 흙으로 만들어진 기물도 아닌 내열판.

개인적으로, 이번 전시가 작가에게 창조적 동인動因이라는 측면에서 전환점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예술은 삶을 표현하는 일종의 표상이며, 따라서 작가 자신의 삶의 국면이 드러나게 되고 거울같이 자기 자신을 비춘다. 예술의 반성적 측면이다. 나는 작가가 내열판에서 발견한 얼굴들과 그 표정 그리고 이것저것 주워 모아 만든 네발 달린 ´뻘줌한´ 개로 여겨지는 들짐승들에서 치열한 삶에서 빗겨나 조금은 자유로워지는 내 자신 혹은 삶의 잉여적 가치를 본다. 쓸모 있다는 것이 가치 있는 것은 아니다. 쓸모 있는 한, 그 쓸모에서 발을 뺄 수 없다. 그러면 쓸모로서의 인생을 살아야 한다. 그러면 사회적으로 쓸모가 없다는 것을 두려워하고, 자신을 쓸모 때문에 계속 소외시킨다. 쓸모만 남고 자신은 소멸된다. 그리고는 사회에서 쓸모가 없어지는 순간 이미 ´자신을 버렸기 때문에´ 남는 것이 하나도 없게 된다. 그 후에는 ´쓸모없는 노인´이 된다. 엄밀하게 말하면, 치열한 삶에서 빗겨나서 자신을 돌아보고 지키는 역할이 예술적 영감에 부여된다. 인간에게 예술적 영감이 필요한 것은 자기 자신을 사회적 이용가치에서 지킬 수 있기 때문이다. 사회적 필요라는 측면의 삶은 본래적 인간가치의 피를 빨아 지탱된다. 사회적 삶의 성공을 자아실현이라고 말하는 것의 의미심장함을 되 뇌여 보라. 나는 작가가 인간으로서 자신(이호상이라고 이름 붙이기 이전의, 관계 이전의 인간)의 가치를 만들고 행복해하는데 예술행위를 사용했으면 한다. 연애하듯이 사물을 보고 거기서 동질감을 발견하고 그리고 그것이 작가의 손을 거쳐 다른 사물이 되는 것. 그것을 예술이라고 한다.

뮬라이트 내화판 외 혼합재료 각 30x3x30cm

 

작가와는 파편화된 추억이 좀 있다. 대부분이 밤에 술과 더불어 만들어진 것이다. 전시와 관련하여 햇볕 아래에서 서로 공손하게 혹은 진지하게 하던 이야기는 해가 넘어가면 사라지고 히번득한 눈매로 혹은 재기발랄한 입담으로 혹은 설익은 사내들의 허풍으로 만들어진 추억들이 이젠 먼 이야기가 되었다. 시간은 가고 사람은 변하고 어느덧 우리의 눈동자도 날카로움을 잃고 혀도 순해졌다. 성질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러나 한가지는 불변이다. 여전히 예술에 대한 애정이 있고, 그것으로 자신의 삶을 지키려 한다. 목적과 수단이 반반쯤 되었던 예술이라는 친구가 이제는 수단으로써의 가치를 많이 잃었다. 예술을 수단으로 공명심을 만족시키거나 이 세계에서 ´가오´를 세우겠다는 의지는 세월과 더불어 많이 꺾였다. 그래서 예술이라는 것이 더 친근해지고 더 가까이 둘 수 있게 된지도 모르겠다.

이번 전시가 마지막 개인전이 될 확률도 적지 않다. 삼십대에 개인전을 하고, 오십을 바라보는 나이까지 개인전을 못할 것이라고는 작가도 생각하지 않았으리라. 개인전을 지속하는게 무슨 커다란 의미가 있으랴만은, 나는 작가가 좀더 자주 자신이 가지고 있는 면모를 남들에게 전면적으로 보여줄 수 있는 기회를 가졌으면 한다. 그리고 연애하듯 혹은 자신을 바라보듯 작업을 지속했으면 한다.

 

 

김영민 가나아트센터 상무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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