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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3.08월호 | 뉴스단신 ]

잔잔히 가는 예술의 기품은 무엇인가
  • 편집부
  • 등록 2014-10-31 15:59:02
  • 수정 2014-10-31 15:59: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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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잔히 가는 예술의 기품은 무엇인가

안재영 국립 광주교육대학교 미술교육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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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평자 입장에서 예술에게 바라고 원하는 것이 있다면 바람이나 물결이 가라앉아 거의 움직임이 없이 잠잠한 것이다. 분위기나 형세가 큰 변화 없이 고요하고 평화로운 것처럼, 멀리서 저녁 종소리가 잔잔히 울리는 것처럼, 영화가 끝나자 잔잔히 밀려드는 감동 때문에 오래도록 자리에서 일어서지 못했던 것처럼 이 같은 태도를 가진 차분하고 평온한 예술들이 세상에 더 많이 살아 숨 쉬도록 하는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현대예술은 더욱 그럴 수밖에 없는 다양한 요소들로 빠르게 변화하고 혼돈스러운 상황이다.

현대 예술은 기본적으로 일단 빨리 변화무쌍變化無雙하고, 화려하고, 빨리 새롭다. 또 빨리 독특하고, 빨리 판단하고, 빨리 내 감정이 스며들어 최고가 되어야 한다. 물론 영화, 음악, 미술 등의 문화예술이 무언가에 의해서 화려하고 색다른 아이디어들로 연출된 것이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다. 다만 평자가 본고에서 꼬집어 끌어내고자 하는 것은 예술가의 동기motive나 자세다. 무엇보다 오래가는 잔잔한 중심 요소가 중요하다. 너무 이른 나이에 빨리 튀고자 하는 것, 빨리 라이트를 받고자 하는 것들이 오랫동안 잔잔한 모습을 주지 못한다는 점은 여러 통로의 통계를 보아 많다는 것은 이미 시사되어 있다.

현대에 와서 예술의 상황은 보편적으로 수준 높은 기술력과 실험정신이 넘치는 작품들로 많은 부분 장식되고 전시되어 연출되는 편이다. 이것은 한 시대의 흐름일수도 있지만 젊은 층이 중심이 되어 주로 이루어지고 있는 향연으로 이 향연을 펼치는 작가들의 창작세계를 이해하기 힘들어 하는 관람객들도 많다. 즉, 그때만의 관객들이 생겨나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보면 오랫동안 관객의 기억에 내 추억을 담아 둘 수 없게 되고 결국 그 당시만 이해하는 상황이 된다.

1990년대를 돌아보면 인스톨레이션Installation이라는 설치작업들이 급속히 확산되어 뉴욕, 일본, 프랑스 등 세계의 전시장에는 진보적인 표현수단으로 설치작업이 유행했다. 모더니즘시대의 학문적이고 과학적인 사고들은 공간을 움직였고, 이것은 현재까지 지속성을 가지고 움직여지며 미디어 및 첨단매체들로 확장, 활용되고 있다.

첨단의 예술세계에 들어가 그들의 생각에 노장사상을 끼워 넣고 싶다. 노장사상은 도가道家의 중심인물인 노자老子와 장자莊子의 사상만을 가리키는 좁은 뜻의 도가철학을 의미하는 말이 아니다. 오히려 노자와 장자의 사상을 바탕으로 이루어진 수많은 논변들도 노장사상의 범주 안에 포함된다고 보는 것이 옳다. 아무튼 노장사상은 무위자연無爲自然을 도덕의 표준으로 하고, 허무虛無를 우주의 근원으로 삼는 노자老子와 장자莊子의 사상이다. 평자는 이 같은 노장사상의 기품이 깃든 예술 작업들이 활발해지길 원하는 바람과 절심함을 요구하고자 하는 것이다. 노장사상의 예술관처럼 첨단의 인위적인 요소와 기술들을 작품에서 최대한 배제한 자연스러운 잔잔한 멋이 무엇인가를 헤아려 요즘의 예술에서 많이 보여지게 하는 것도 관객의 눈과 영혼을 상쾌하게 하는 것 아닐까라고 진정한다.

물론 언어의 표현조차도 전자電子의 방식으로 변화돼 이제 전자기술은 전화, 라디오, 텔레비전 등 가지각색의 기술에 의해서 2차적인 구술성 시대로 끌어넣었다. 이 2차적인 구술성은 사람들이 참가한다는 신비성도 있고, 특유의 고유한 감각을 키우게 된다. 하지만 이 구술성은 그 본질에 있어서 다분히 의도적이고 스스로를 의식할 수 있도록 구성된다.

과학과 예술은 모두 창조한다는 각각의 범위 내에서 순수하다는 공통점이 있다. 하지만 보여만 지고 철학 없이 막연히 활용될 때는 잔잔해지지 않고 화려해만 진다는 것이 요지다.

20세기를 돌아보면 18세기 영국에서 산업혁명이 시작된 이래 과학기술을 중심으로 한 근대화의 물결로 넘쳐나 지금까지 세계적으로 널리 파급되고 있다. 특히 인간의 의식, 감각, 생활양식에 여러 가지 변혁이 일어난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리고 인간과 기계의 관계가 점점 심화되어 예술 분야에도 격렬한 반응이 나타난 것도 인정한다. 다시 말해서 우리의 눈은 기계를 신과 같이 찬양하고, 필요로 하고 있으며 친근한 눈길로 바로 보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제는 많은 작가들이 정밀한 기계부품을 이용해 예술작품으로 만들어 내기도 한다.

아쉬운 것은 이 같은 과학기술을 이용한 예술작품 혹은 작가가 잠깐 반짝이는 스타로 떠올랐다가 이내 쉽게 사라진다는 것이다. 무언가 지속적으로 의미를 충실히 담고 기억에 남을 만한 족적이 없다는 의미이다. 나의 집 뒷동산이나 엄마 품과 같은 포근한 이야기를 하는 산같은, 무언가 한국적이면서도 오랫동안 자리하는 백세百歲의 기품 있는 현역작가들의 모습들이 요구되는 부분이다.

20세기는 공통적으로 큰 의식의 변화가 있었다. 이유야 어떻든 이제는 예술이 사람을 살릴 수 있다고도 생각한다. 작품을 바라보고 몰입돼 즐거움을 갖거나, 위로의 생각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한 작가의 작품을 기술로 볼 것인가 아니면 사회적인, 시대적인 흐름으로 보아야 할 것인가의 설명적 해설이 필요한 것이 아니다. 예술인이라는 탈로 그냥의 제품을 보이는 것이 아니라 최소한 오랫동안 갈 수 있는 기품氣品이 필요한 것이다. 예를 들어 현대 사람들은 가수 싸이Psy를 티브이TV에서 보지 못하면 본인이 휴대하고 다니는 손전화를 통해 유튜브Youtube로 찾아본다. 대중이 예술가를 키우는 것이다. 이처럼 대중이 적극적으로 다가가 무언가를 찾아 만드는 시대가 도래 했다. 과거 우리가 오래 동안 간직한 위대한 작품들은 문학을 통해서, 시를 통해서 영감을 얻을 수 있었고 지금까지도 영원히 가슴 속에 속속히 배있다. 그래서 오셀로Othello는 사랑을 비극적으로 표현한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Mozart, Wolfgang Amadeus, 베토벤Beethoven도 있지만 봄의 소리 왈츠의 요한 스트라우스Johann Strauss나 프레드릭 쇼팽Fryderyk Chopin의 왈츠도 있다. 이처럼 잔잔하게 여운如雲이 될 예술로의 다양한 접근들이 필요한 것은 왜일까. 너무 첨단을 일색으로 하거나 너무 지나친 주류는 분명 위험하다. 그것이 일반인들에게 최고의 정답이라고 착각을 주기 때문이기도 하다. 어떠한 예술에 대해서 내용을 뚜렷이 알 수 없을 만큼의 논리적이거나 구체적이지 못해도 좋다. 배고픈 작가정신을 가지고 막연히 누구를, 시대를 흉내 내듯이 쉴 새 없이 첨단으로 만들어진 붓을 날린다면 그건 분명 앞뒤가 안 맞는다. 물론 나는 철학자니까 인정해주길 바라면서 마음껏 나태해지고 술이나 마시며 생활해야한다는 것은 아니다. 이런 모습은 그들 작품을 보는 관객을 혼란스럽게만 한다.

전통이나 대대손손代代孫孫 물려줄 유산은 좋지만 의리처럼 계속 배운 대로 학습하는 것 또한 훌륭한 장인정신의 모습은 아니다. 무엇인가의 분명한 기품氣品 없이는 안 되는 것이다. 진정한 예술가는 사물에 대해서 더욱 깊이 보고 멀리 볼 필요가 있다. 시장논리에 의해서나 정치에 의해서 일등 예술이 만들어진다고 해서 진정한 일등이 아니다. 그것은 형식적인 모습들인 것이다. 예술에서 일등은 없다. 자기답게 하면 된다. 하지만 자신의 기품氣品이 살아 숨 쉬어야 한다는 조건이 있다. 그냥 시대의 유행이나 변화에만 능통한 것이 새로운 것이 아니다. 과거 고려시대 무신들의 독재정권인 무신정권武臣政權의 최충헌은 무뿐만 아니라 문과 시에도 능통했다. 그는 단순히 칼을 쓰는 무장이 아닌 그만의 철학들로 무장하여 스스로 오랜 기간 지속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이 세상에는 스스로 알리지 못하는 숨어 있는 예술가들이 대다수다. 멘델스존Mendelssohn이 바흐Bach, Johann Sebastian를 발굴해 그 업적을 세상에 소개했듯이 평자에게는 스스로 본인을 살리지 못하는 무명이고 숨어 있는, 진정한 기품氣品이 서린 예술가들을 찾아 알려야 할 의무 같은 것이 내재한다.

어찌 보면 철학은 자기위치를 깨닫게 하지만 예술작업은 스스로가 자신을 빛나게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작품에는 유행이 아닌 그 자신만의 정리된 철학이 있어야 오래가고 건재하다는 것이다. 유럽혁명의 나라 프랑스의 똘레랑스tolerance처럼 예술작품에도 자유와 관용 그리고 나와 다름을 인정하고 현재 잘하는 자와 있는 자를 배려하는 기품氣品이 존재해야 한다. 사회적으로 보면 1995년도 GATT 체제에서 WTO 체제로의 전환은 보여 지는 공산품에서 보여 지지 않는 것까지 관여하는 국제무역기구 시대로 전환한다는 것이다. 현대는 이제 이처럼 보여 지지 않는 것까지도 예술에 포함시켜 관객이 스스로 생각하게 만들어 기품氣品들을 내재하게 만든다. 현재는 글로벌시대 아닌가. 또한 과학과 기술이 지배하는 시대이다. 과거의 산업화産業化가 지식을 쌓는 것이라면 글로벌시대에는 정직과 성실, 인성이 교육되어 밑받침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 위에 폭넓은 지식과 예술이라는 전문지식을 쌓아야 한다. 결국 이런 모습들이 잔잔한 기품氣品으로 이어지는 것이 아닌가.

과거 레오나르도 다빈치Leonardo da Vinci,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 연암 박지원, 다산 정약용 등은 다양한 분야를 섭렵했다. 물론 그때는 지식의 깊이가 대단한 시절이 아니다. 조금만 파면 지식이 보일 때 일 것이다. 여러 가지에 대해 나름의 전문성을 가지고 할 수 있었던 시절이었을 것이다. 요즘은 한 개인이 여러 분야를 통달한다는 것이 어렵다. 그래서 예술가라면 융합하고 섭렵하면서 자신의 예술 주특기를 길러야 한다. 이를 위해서 꼭 필요한 것은 철학이다. 즉, 얼마나 심도深度있게 전체를 읽어가며 집중 하느냐가 매우 중요하다. 무언가 서로 다른 양식들을 섞고 비벼, 융합해 새로운 것들로 만들어도 기품氣品이 깃들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인생사 고생이 있어야 내공이 쌓여 더욱 빛을 바라는 것처럼 꼭 빨라야만 되는 것은 아니다. 물론 세상이 변하기 때문에 과학기술을 몰라서는 안 된다. 극작가이자 소설가인 괴테Goethe가 파우스트Faust를 60년이라는 기간에 걸려 집필한 것을 보면 알 수 있듯 대사 한마디도 바로 나오는 것이 아니다. 예술은 긴 호흡이 필요하다. 학교에서 배운 것에는 정답이 있는 것이 대부분이다. 하지만 예술은 아니다.

배움의 장소에서도 스스로 분명 틀린걸 알면서도 아집我執으로 가득 찬 몰지각한 스승도 있을 것이고, 훌륭한 스승도 있다. 진정 예술을 원한다면 스승에게 의지하지 말고 스스로 극복하고 훈련하는 습관도 길러야 한다. 그래야 예술이라는 이름의 작품을 창조함에 있어 작가특유의 정체성正體性으로 공감共感을 얻고 보편성普遍性과 조형성造形性을 담은 기품氣品을 낼 수 있는 것이다. 현대예술은 하나의 생각이 아니다. 과거를 보는 사람, 미래를 보는 사람, 현재를 보는 사람, 사회적 입장에서 보는 사람 등 예술가의 입장에 따라서 다양하다. 그래서 어떤 시각으로 보는냐는 굉장히 중요하다.

  마지막으로 본고에서 평자가 예술의 기품氣品을 거론한 것은 거대한 철학을 말하고자 하는 것은 아님을 밝혀두고자 한다. 빠른 슈퍼스타가 아닌 예술가로서 자신의 작품을 급하지 않게, 서두르지 말고, 꾸준히 연마해가는 태도가 중요하다. 절대 순간의 유행이나 흉내에 탑승해서는 안 된다. 그래서 진정한 예술은 아무나 할 수도 없고, 배고프고 힘든 것이다. 예술에서는 승패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몇 번 승을 거두어 이긴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패가 많더라도 긴 호흡으로 오랫동안 꾸준히 하는 것이 더해져, 지속 할 수 있을 때 예술의 기품氣品이 잔잔히 서리게 되는 법이다.

 

 

필자 안재영 성균관대학교와 고려대학교대학원을 졸업하고 서울대학교행정대학원을 수료했다. 대한민국미술대전 초대작가와 서울미술대전 초대작가, (사)한국예술문화비평가협회 회원이다. 1998년 월간한국미술평론 공모에 당선했으며, 2011년 미술과 인문학의 해후와 전환으로 미술비평상(서울아트포럼공모)을 수상했다. 또한 부산미술대전(미술평론)심사위원, 대한민국미술대전(평론)심사위원으로 위촉되었다. 현재 국립광주교육대학교 미술교육학과 학과장으로 재직 중이며 중국요녕미술직업학원 석좌교수로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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