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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2.10월호 | 특집 ]

엑스포 이후,한국 도예문화에 대한 인식
  • 편집부
  • 등록 2003-07-11 12:50:42
  • 수정 2018-02-20 16:2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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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세계도자기엑스포 그 후 1년, 새로운 과제

엑스포 이후, 한국 도예문화에 대한 인식

글/사진 박종훈 단국대학교 도예과 교수

 가도가도 끝이 없이 펼쳐지는 초원... 주위의 산도 보이지 않는다. 며칠을 달려도 끝이 없다. 이따금씩 보이는 양떼들과 말떼들. 자기땅이 없는 사람들을 와서 살게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아니 우리 학생들의 수학여행지로 선택하여 하루해가 질 때까지 가질 수 있는 만큼의 땅에 줄을 그어 보라고 해도 남을 넓은 땅. 징기스칸의 말발굽 소리가 아직도 들린다. 끝없는 초원에 봄이 왔다 싶으면 여름이고 가을이 왔나보다 하면 겨울인 나라 몽골. 마을에 도착하여 식당을 찾았다. 배고픈 눈에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양고기. 그리고 고기를 담은 그릇들. 그것은 도자기들이었다. 우리네 식당들이 잘 깨지고 비싸다고 기피하는 도자기를 몽골의 시골 식당에서 스스럼없이 쓰고 있다니, 내가 생각하고 있던 G.N.P 의 차이에 따라 그릇을 사용한다는 개념이 쓸모가 없어지고 말았다. 도자의 쓰임은 G.N.P 의 많고 적음에 있지 않고 그릇을 쓰는 문화에 달린 것이다.

 그날 도자 그릇에 담긴 음식이 그렇게도 맛있는 줄 예전엔 미쳐 몰랐다. 도자기는 깨진다. 도자를 다루는 솜씨가 험하거나 서툴면 깨지기 마련이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도자의 관심과 인식이 새로워지지 않는 한 도자기가 일반화되어 서둘러 널리 사용되어 지리라는 보장은 없다. 현재의 한국은 도자에 대한 관심과 쓰임이 너무도 저조하다. 그것을 2001년, 세계 도자기 엑스포 조직위원회가 엑스포를 통하여 도자에 대한 인식과 쓰임을 위하여, 그리고 세계의 도자의 방향을 알기 위하여, 국제적인 행사를 치루었다.

 그후 1년여가 지났다. 그 이후 도자에 대한 인식이 얼마나 또는 어떻게 변했을까? 현재를 이해하기 위하여 우리는 과거로의 시간여행을 할 필요가 있다. 우리 나라의 도자기는 어떤 사람들이 어떻게 사용했을까? 도자 예술은 어느 시대 어느왕조를 막론하고 그 시기의 첨단의 기술이며 재정이 뒷받침 되야 하기 때문에 왕실이나 귀족이 먼저 사용하고 일반백성들은 한참 뒤에야 사용하게 되었다. 일반백성들이 고급 문화를 동경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귀족이나 왕실은 그들 나름의 문화를 지키려 했다. 즉 왕실에서 사용하는 고급 백자를 일반백성이 사용하는 것을 막기 위하여 조선왕실은 엄한 처벌을 두고 있다. 일반백성이 백자를 사용하다 발각이 되면 “임금의 의관과 말을 빌려 탄 죄로 다스리겠다”는 실록의 기록으로 보더라도 백자를 얼마나 귀하게 여겼는지 모른다. 백자를 사용하는 것이 곧 신분을 나타내는 일이기도 하였으니 일반 백성들은 백자를 얼마나 갖고싶었겠는가?

 백자를 귀한 것으로 인식하게 된 것이다. 대신 그들은 그 동네의 사기막골에서 생산되는 사발을 사용하게 되었다. 금속보다 구하기 쉬운 흙으로 구운 사발은 일반 그릇의 80%를 차지하고 있다. 지방마다 재질이 다르고 솜씨가 다르니 다양한 제품이 생산되게 되었다. 이렇게 질 좋은 백자는 왕실에서 사용하였고 사발은 일반 백성에 사용하는 대중의 그릇이었다. 이렇듯 그릇은 신분을 나타내는 척도가 되었던 과거와 마찬가지로 현재에도 품위 있는 그릇을 장만하는 것은 그 집의 문화 척도, 가족 구성원의 품위로, 특히 주부의 품격을 가늠하게 되었다. 그래서 남에게 보이기 위한 비싼 외제 혼수 그릇이 오가기도 하며 유명 작가의 제품을 선물해야 자신의 품격이 유지된다는 생각들이 있는 한 우리 도자의 미래는 밝지 않다. 우리는 초등학교 교과서로부터 고려청자는 세계적인 명품이라고 배웠다. 상감의 방법이 독창적이라고 배워 왔다.

 그런 것들을 생활에서 실천적으로 사용할 수 있다는 실전의 교육, 응용의 교육은 받지 못했다. 우리의 머리 속에 남아있는 도자는 사용하는 도자이기 보다는 명품 도자기로 잘 보호되고 감상되어지는 것으로 각인되어 있다. 사용되지 못한 이유는 격동기에 도자기를 쓸 생각과 여유가 없었던 시기 때문이라고 치부하기에는 너무 유행에만 민감하게 살지 않았나 생각된다. 필자의 주위 사람들도 어느덧 곳곳에서 중책을 맡고 있게 되었다. 소단위의 장이거나 리더의 역할을 하는 이들이다. 그들조차 도자에 대해서는 무지함을 스스로 자인하고 있을 뿐 아니라 도자는 깨지지 않게 잘 보관하다가 훗날 투자 가치로서의 물건으로 생각을 하고 있다. 다른 문화와 연결되지 않는 문화는 도태되게 마련이다. 도자 문화 역시 인접 문화와 연결되지 않으면 안된다. 명절 선물용으로도 사용되어야겠지만 실생활에서 사용되지 않고는 도자의 발전을 기대할 수 없다. 도자 문화와 인접문화와의 긴밀한 관계의 예를 이웃나라 일본에서 살펴보기 위하여 400여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보자. 무장들이 날립하던 때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전 일본을 통일하고 다도와 벚꽃놀이를 장려한다. 무사들의 뜨거운 피를 정서 문화로 전환시키는 중요한 작업의 일환으로 차를 마시는데 조선의 그릇이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그의 차선생은 센노리큐(千利休).

그는 禪을 하는 것이 차(茶)를 마시는 것과 같은 경지라고 생각하고 무사들을 다도의 세계로 이끈다. 차행사를 대대적으로 열고 공이 큰 무사에게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로부터 조선의 사발을 하사 받게 한다. 차를 담는 그릇으로서의 조선 사발은 무사들에게는 가문의 자랑으로 대대로 물림을 하는 보물이 되게 한다. 1951년 조선 사발이 일본 국보로 지정된 연유도 그렇다. 조선의 사발을 얼마나 원했던지 1591년 센노리큐를 자결하게 만들고 1592년 임진왜란으로 조선왕조를 침략하여 사발뿐 아니라 도기장을 잡아가기까지 했으니 그들이 갖고 있었던 차와 도자에 대한 관심은 자신의 생명과 맞바꿀 수 있는 대단한 것이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도자기를 정치적으로 이용한 인물이다. 국가 정책으로 차와 도자를 접목시켜 일본도자 문화에 획을 긋게 만든 그는 비록 조선의 침략자이지만 도자문화를 일본에 심어놓은 인물로 평가된다. 조선에서 잡아간 도기장들의 기술과 경덕진의 중국 화공들이 일본으로 유입되어 기술과 그림이 잘 어울어진 일본의 도자는 유럽과 교역을 하게 된다. 그리고 400여 년의 도자의 전통이 확립되어져 지금까지 이어 오고 있다. 이렇듯 우리나라에서도 도자기 엑스포라는 세계적인 도자의 잔치를 열었다. 막대한 예산으로 외국의 홍보뿐 아니라 국내 최대의 잔치를 벌였다. 이 후 우리의 도자에 대한 인식은 어떤한가? 달라졌는가? 그대로인가? 아니면 전환이 필요하다고 느끼는가? 한 개인의 생활에서도 인식이 하루아침에 변하지는 않는다. 더구나 그대로일 수는 없다. 인적문화와의 끊임없는 교류와 수정으로 서서히 시대적인 요구에 따르게 된다.

 엑스포 그 이후의 한국 도예문화에 대한 인식의 전환이 필요하게 되었다. 현대의 도자 문화는 도자의 한 종목으로 존재하지 못한다. 대중들이 필요로 하는 다양한 문화와 도자가 접목되는 풍토가 마련 되야 하고 그것을 널리 펼칠 수 있는 기회를 유도해주는 정책이 필요하다. 앞서 일본의 예를 보듯이 정책입안자 또는 주최측이 그 나라 도자의 현실을 정통으로 이해한 개인 또는 집단이어야 한다. 도자기 엑스포가 슬로건으로 내세운 ‘세계로 미래로’란 말에는 세계로 내보일 수 있는 기술의 축척이 포함돼있다. 과연 지역별로 특별한 기술이 축척되어 있었는지 자문해 보자. 도자는 생활과 떨어져 있지 않듯이 이천, 여주, 광주의 각 요장을 그대로 살렸으면 어떠했을까? 따로 큰 행사장을 만들어 제품을 옮기고 인테리어를 하고 부스비를 부담하게 하지 않고 기존의 집집과 골목, 요장을 단장케 하면 생활과 도자가 연결된 효과를 볼 수 있었겠다.

백화점 맛보다 재래시장 맛을 살리려는 적극적인 생각의 전환이 필요했다. 한쪽으로 몰아서 큰 행사장을 만들고 건설한 비용을 각 제작자에게 제공되었으면 실제적인 도움이 되었다고 고마워나 할터인데… 도자기 엑스포는 한국의 정치 형태를 그대로 옮겨 놓았었다. 전시 효과를 극대화시키기 위해 도자 문화를 한국의 정치적인 논리로 숨가쁘게 몰아간 형태였기 때문에 자발적이고 창의적이지 못했다. 장터를 만들어 놓았으니 ‘장사할테면 와서 해라´ 라는 식이였다. 외국작가를 모셨으니 볼 테면 보라였다. 국내의 형편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 전시 효과의 엑스포를 완성시키기 위해서는 도자기를 잘 알고 이해하는 정책 입안자가 다시 정리를 해야한다. 각 엑스포장에 문화를 심어야 한다. 없으면 길러야 하고 그 책임자는 일본의 센노리큐와 같은 혜안있는 자문역을 곁에 두고 정책을 입안하고 실행해야 한다. 그 입안자가 제일먼저 살필 것은 지금, 여기가 어떠한 형편인가를 잘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 존경받지 못하는 도자기 제작자 속에 속하는 필자는 도자 문화에 대한 인식의 전환이 필요하다고 역설하는 한편, 실무진들의 전문화, 또는 전문인으로 교체를 요구하면서 이제부터라도 도예인들의 전문가로서 자세와 자존을 기대한다. 도기장들이 주체가 아니고 예산 집행측이 주인이 되었었다. 밀어서 가게하고 끌어서 오게 한 엑스포. 이제 껍질만 남은 행사장에 실속 있고 구체적인 문화가 심어져야겠다. 앞으로는 장터를 만들어 준다고 살 사람이 오는 것이 아니고 문화를 만들면 어느 골목이라도 찾아서 온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급조된 장터에는 문화가 없다.

 어느날 흐지부지 되고 말수도 있다. 문화가 없으면 사람이 오지 않는다. 이천. 여주. 광주의 문화를 만들어야 할 때이다. 공방 문화도 함께. 문화는 단독으로 존재하지 못한다. 도자를 발달시키기 위해서는 인접문화를 접목시켜야 한다. 김치여, 차(茶)여, 그 외의 세계적인 먹거리들이여 우리 한국의 도자기와 친하게 놀자!

 필자약력 개인전 8회 (골호전, 물레작업전, 솟대와 그릇전 등) 화랑미술제, 서울공예대전, 동양도자전 초대 현 단국대학교 도예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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