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예계의 진정한 거인
글 김학균 도예가 + 자료 및 사진제공 Chris Autio&Montana Museum of Arts and Culture
Rudy Autio :: 루디 오티오
미국 현대 도예의 개척자이자 모든 이들의 친구인 루디는 2년여의 백혈병과의 투병 생활 속에서 지난 6월20일, 80세를 일기로 아쉽게도 타계하였다. 몬타나 대학원 과정에 있는 필자에게 많은 격려와 사랑을 아끼지 않았던 그분의 죽음을 애도하며, 그의 삶과 작업 그리고 지난 7월말 개최된 두 번의 루디 추모식Rudy Memorial Service&Reception에 관해 소개하고자 한다.
루디 오티오Rudy Autio는 1926년 미국 광산도시로 잘 알려진 몬타나주 뷰트Butte, Montana에서 태어났다. 루디는 핀란드Finland에서 이주한 광부, 에르네Arne와 요리사인 셀마Selma의 가정으로 핀란드어를 사용하는 부모님과 핀란드 이민자 공동체 생활은 루디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또한 80년대 초대작가로서 여러 차례의 헬싱키 방문은 그의 작품을 유럽에 알리는 계기가 되었으며 유년시절의 다양한 경험은 당시 그의 작업에 큰 이점으로 작용하였다.
그는 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 해군으로 복무하였으며 1940년대 말 보즈만에 위치한 몬타나 주립대학Montana State University, Bozeman에서 학부과정을 시작하였다. 루디는 평생의 반려자인 릴라 오티오Lela Autio를 비롯해 가장 오랜 친구이자 작업동료인 피터볼터스Peter Voulkos 그리고 가마번조법, 성형법 등 탐구해야 할 모든 도예의 기초뿐만 아니라 흙의 모든 가능성에 관해 알려준 프란센스 센스카Frances Senska 등과의 만남을 소중히 기억하며 당시를 회고하였다.
몬타나 주립대 졸업 후에는 워싱턴 주립대학Washington State University, Pullman 대학원에서 M.F.A학위를 받았다. 졸업 후 몬타나주 헬레나Helena, Montana에서 헨리&피터 몰리Henry&Peter Meoly형제와 함께 작업실을 사용하면서 그들로부터 웨스턴 몬타나 클레이Western Montana Clay를 소개받게 된다. 초기에 루디는 피터 볼커스와 함께 낮에는 벽돌을 생산하고 저녁에는 작업을 하며 그들의 젊은 열정을 쏟아 부었다. 그들은 훗날 이곳이 ‘흙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이들을 위한 공간’(A place to make available for all who are seriously and sincerely interested in any of the branches of the ceramic arts, a fine place to work. Archie Bray, Sr. 1951)이 되길 굳게 믿었다. 그리고 이 공간은 50여년이 지난 지금 전 세계 수 백 명의 도예가들의 흔적을 고스란히 담은 공간이 되었다. 그들의 열정이 지금의 ‘아치브레이재단ArchieBray Foundation’을 있게 한 것이다.
1952년 일본의 도예가 쇼지 하마다Shoji Hamada와 영국 도예가 버나드 리치Bernard Leach 그리고 철학자 야나기 무네요시Yanagi Muneyoshi의 방문은 이곳 아치브레이를 체류작가를 위한 공간으로 새롭게 도약시켰다. 워크샵에서 그들 일행이 보여준 무심無心의 자유로움을 담고 있는 동양도자는 루디와 피터의 눈에는 신선한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그들의 회합은 당시 미국 회화의 추상표현주의를 도예에 접목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1957년 루디 오티오는 아치브레이를 떠나 몬나타대학University of Montana, Missoula에 도예 프로그램을 개설하고 28년 동안 교육자로 많은 후학들을 지도하였다. 그의 아들 크리스 오티오Chris Autio가 들려준 당시 수업과정에서의 일화 하나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루디의 수업을 듣는 한 학생이 작업실 한 구석에 있던 루디의 머그컵을 시유하여 학기말 평가에 제출하게 됐다. 루디는 일견에 그의 작업임을 알아보았지만 그의 잘못을 꾸짖기보다는 형태와 시유방법에 관해 조언을 해주었다고 한다. 이 일화에서 알 수 있듯이 그는 학생들에게 늘 격려와 조언,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러한 그의 격려와 칭찬은 흙을 처음 접하는 학생들에게 지속적인 탐구를 가능하게 한 것이다.
교육자로서 루디의 교습방법은 많은 이들의 귀감이 되고 있으며, 도예작가로서의 열정은 미국 국내외 여러 갤러리의 전시와 미국 현대도예를 대변하는 중추적인 작가로 이미 여러 책자에 소개된 바 있다. 잘 알려진 그의 작업들은 조각적인 기器의 형태로 원색적인 칼라 위에 말과 여인들의 힘찬 드로잉이다. 이 작업들은 도예의 마티스Matisse of Ceramics를 연상하게 한다. 그 밖에도 철, 콘그리트, 도자 등 다양한 재료를 이용한 환경조각을 꼽을 수 있다. 참고로 그의 공식홈페이지에는 그의 과거 및 최근 도예 작업, 드로잉, 판화 등이 소개되어 있다.
지난 7월21일 오후 몬나타대학 내 극장에서 열린 추모식은 오백여명의 인파로 가득 메워졌다. 그의 위대하고 행복한, 사랑이 깃든 삶이 고스란히 반영된 이 행사는 그를 사랑하는 이들의 눈물과 웃음이 교차된 자리였다.
미쥴라 아트 박물관 책임큐레이터인 스티븐 글루커트Stephen Glueckert, 몬타나대학교 교수로 있는 라파엘 시콘Rafael Chacon, 대학동료였던 시어도르 와들Theodore Waddell 그리고 몬타나 환경조각가인 페트릭 젠츠Patrick Zentz가 오백여명의 추모객들의 참석에 감사하며, 그들이 기억하는 루디의 삶과 영향에 관해 이야기 하였다. 이 환영인사에 이어진 루디의 고별인사Rudy’s Farewell는 그의 임종을 앞두고 그의 아들 크리스 오티오가 제작한 슬라이드 다큐멘터리로 이루어졌다. 루디의 육성을 들으며 한 장 한 장의 사진과 작품들을 보고 그의 삶과 열정을 느낄 수 있었다. 많은 이들이 눈물과 기쁨으로 화답하며 그가 남긴 이야기를 가슴에 깊이 간직하는 듯 한 모습이었다. 고별인사 이후 그의 작업과 업적에 관한 소개가 있었으며, 이어서 그의 사랑하는 가족이 소개되었다. 끝으로 로컬 뮤지션의 추모공연이 있었고 행사 이후 학교 인근 공원에 리셉션이 마련되어 조문객들이 서로 인사하는 자리를 가졌다.
지난 7월29일에는 아치브레이에서도 그의 삶을 애도하는 추모식행사가 열렸다. 여기서 인상깊게 본 한가지 일화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일요일 오후 미국 전 지역에서 루디를 사랑하고 기억하는 이들이 참석한 가운데 추모행사는 스티븐 영 리Steven Young Lee:Resident artist director의 환영사로 시작되었고, 루디의 여러 동료(Richard Notkin, Don Reitz, John Board, Josh Deweese, Autio Family and Ken Little)들은 그의 삶을 애도하는 연설로 진행되었다. 더운 날씨였고 실외에서 진행된 여러 패널들의 연설이 다소 지루해질 때 쯤, 오랜 동안 루디와 동거 동락한 준 가네코Jun Kaneko의 연설이 시작 되었다. 그의 연설 역시 슬픔에 잠긴 작은 목소리였다. 갑자기 그의 호주머니 속에서 핸드폰이 울렸고 모든 청중들의 시선 집중에도 불구하고 그는 핸드폰을 꺼내 들고 통화를 하였다. 통화의 내용은 이러했다.
"안녕 루디 잘 있었나? 거기는 어때, 있을 만한가 ? 언젠가 그 곳에서 우리 만나세 " .
연설도중 벌어진 이 해프닝은 모든 청중을 웃음바다로 만들었다. 이 해프닝은 우리가 기억하는 루디의 일상의 모습을 대변해주는 일례라고 생각된다.
위에서 살펴본 것 처럼 루디의 타계에도 불구하고 열려진 추모행사들과 전시는 그를 사랑했던 이들의 기억속에 그를 간직하고 싶어하는 애도의 표현이라고 볼 수 있다. 그의 여러 행적은 도예계 뿐만 아니라 그를 기억하는 모든 이들에게 오래오래 함께 할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으며 도예계의 진정한 거인인 그의 삶과 작업을 회고해 보았다. 참고로 필자가 지난 해 5월 본지에 기고한 루디의 스승인 프란세스에 관한 원고와 8월호 2006 아취브레이 인터내셔날2006 Archie Bray International행사 원고를 참고하면 루디에 관한 이해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된다.
< 더 많은 자료를 보시려면 월간도예 2007년 9월호를 참조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