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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7.08월호 | 뉴스단신 ]

연리문 八百年의 회귀
  • 편집부
  • 등록 2007-08-29 14:58:12
  • 수정 2018-01-22 17:5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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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리문 八百年의 회귀   
글+사진 조일묵 도예가·미술학 박사

현대 도자에서 연리문은 일본과 유럽, 미국, 캐나다, 호주 등 다양한 나라에서 시도, 연구되어지고 있으며 일본에서는 연리문기법을 연상수練上手 Neriagede 또는 연입Nericomi 등 자국의 전통기법으로 확고히 하려는 많은 연구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그 결과 연상수라는 기법에 대한 명칭이 세계 각지로 알려져 Neriage기법으로 통용되어 Japanese Ceramics로 불려지는 등 일본의 전통기법으로  자리매김이 진행 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그러나 연리문은 역사적으로 고려시대 청자와 함께 만들어 졌으며 자료들이 계속 발견되어지고 있다. 이렇듯 우리나라 연리문은 고려시대의 전통기법이었음에도 800여 년에 가까운 시대적 단절로 우리 전통도예의 범위조차 배재되고 있다. 국내에서는 1980년대 이후부터 연리문 작가가 나타나면서 지금은 젊은 작가들에게서 많이 시도되어지고 있지만 타국에 비해 발표되는 정도가 극히 미약하다 하겠다.
이유인 즉은  연리문은 쉽게 접근하기 어려운 몇 가지 요인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첫째:채색 작업에 대한 짧은 역사로 인해 안료와 색소지의 정확한 표준색상표와 안료의 조합비에 따른 데이타 베이스가 구축 되어있지 않은 점.
둘째:기술적 노하우를 공유하지 못하고 있는 점.
셋째:까다로운 작업공정과 기술적 제약을 들 수 있다.

그래서 필자는 이 지면을 통해 연리문 기법의 기술적 노하우를 소개하고 공유함으로써 많은 작가들이 연리문을 현대도자 속에 응용할 수 있었으면 한다. 연리문 도자가 우리의 전통기법으로써 당당한 자리 매김이 이루어지길 갈망하는 차원에서 미력이나마 도움이 되길 자청했다.

우선 연리문에 대한 명칭의 유래와 기원에 대해 살펴보면 연리문이란 명칭은 일제강점기말 1939년 고유섭 선생이 우리나라 도자기가 일본 명칭으로 불리어 지는 것에 대한 우려로 한국미술문화사논총에서 ‘연리류’라는 명칭을 처음 쓰게 되었다. 그 이후 최순우 선생이 여러 가지 흙을 섞어 도자기를 제작한 후 깎아내면 여러 가지 다양한 문양이 나타나는데 그러한 도자기를 ‘연리문도자’라 지칭하였다.
연리문도자의 역사를 살펴보면 동양과 서양이 각각 다른 시기에 나타나는데 필자는 중국의 교태문 도자베개를 연리문의 가장 오래된 문양으로 파악하였다.         
고려시대 연리문 도자
고려시대는 중국의 송과 많은 문화적 교류를 통해 자국의 문화를 고취시켰다. 한 예로 도자기를 꼽을 수 있는데 중국의 청자 기술을 적극 수용하여 질 좋은 청자를 안착시켰다. 연리문도 그 기술교류에서 수용된 기법으로 극소수이지만 청자와 함께 생산되었다. 고려시대 연리문은 청자토와 백자토, 자토 등을 각기 따로 반죽한 후 청자토, 백토, 자토를 합쳐서 다시 반죽하면 세 가지 태질이 서로 번갈아 포개져서 목리문과 비슷한 무늬를 나타내게 된다.
그 위에 투명한 청자유를 씌워서 구워내면 청자소지는 회색으로 백토는 백색으로 자토는 검은색으로 발색된다. 이러한 문양으로 제작된 연리문잔은 바로 그렇게 만든 고려청자의 일종이다. 원래 이러한 연리문 자기는 이미 8세기 중국 성당의 당삼채 저화도의 도기질로 제작되었으며 드물게 오대에서 북송대 이전까지 제작되어진 기법이었다. 중국의 연리문은 마치 판박이 같은 소지 무늬 판을 조작한 인공적인 연리문이 대부분이지만 고려의 연리문은 마치 물과 기름을 휘저은 듯한 자연스런 무늬가 특징이다.
지금까지 고려시대에 제작된 연리문은 10점 정도 발견 되었는데 대체로 발과 완의 형태를 하고 있으며 합이 3점, 호가 유일하게 1점 발견되었다. 전남 강진군 대구면 사당리와 전북 부안군 보안면 유천리에 있는 일반 청자요지에서 함께 구워졌으나 그 수가 매우 적다.(최순우, 한국미술전집 9권, 고려청자, 1975, p.15)
「청자연리문합」은 유약을 얇게 입혀 나무결의 태질이 더욱 선명하게 나타나도록 제작된 뚜껑이 있는 화장품 용기로 연리문 도자의 정수라 할 수 있다. 이것은 12세기 전반 순청자 전성시대의 일반적인 합의 형태와 거의 유사하다. 뚜껑의 세부 특히 상면과 측변의 연결부 구조와 아랫부분의 구조는 순청자와 일치하며 굽바닥에 규사목 3개를 받친 것 또한 같다. 왼쪽 사진의 「청자연리문합」은 뚜껑과 합신盒身의 소지 조합비가 달라서 마치 다른 짝 같이 보인다. 뚜껑은 검은색 소지의 비중이 크고 합신은 세 가지 비율이 적당하게 조합되어 청자라기보다는 무늬 있는 검은 대리석을 깔아 놓은 듯 한 질감이 느껴진다. 유층은 다소 얇으며 미세한 기포가 꽉 차 있고 가는 망상의 균열이 전면에 나 있다.(최건, 한국의 토기, 청자, 예경, 2001, p.484)
이렇듯 고려시대 연리문 표현의 목표는 나무결의 목리문을 표방한 것으로 흑·적·백 세가지 색상이 정연하고 선명하게 나타난 것이 특징이라 할 수 있다. 이것은 한국인의 사상과도 일치한 것으로 자연의 섭리적인 의식구조가 잘 나타난 것임을 확인 할 수 있었다.

다음호에는 중국의 교태문과 일본의 근대 연리문에 대해 알아보자. 
 다음호에 계속

필자 조일묵은 단국대학교와 동대학원을 졸업하고 미술학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김석환 선생의 사사를 받았으며 총 10회 개인전을 가졌다. 현재 서울시립미술관과 단국대학교에 출강중이며 경기도 양평에서 강하도방을 운영하고 있다.

「청자연리문합」  12세기 | 전체높이 3.6×몸지름 7.3㎝ | 국립중앙박물관
「청자연리문잔」  12세기 | 높이 4.8×입지름 9.3㎝ | 국립중앙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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