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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6월호 | 전시리뷰 ]

흑자黑磁와 은기 銀器의 두 장인
  • 정영목 서울대학교 명예교수
  • 등록 2024-06-28 16:5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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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시영, 이상협 <검고 뜨거운 차고 빛나는>
  • 3. 27. ~5. 3. 갤러리밈

장인의 작업

공예는 재료에 천착한 노동집약적 작업이다. 필자가 화두에 던진 “아름다움에의 흠모”는 그다음의 일이다. 그런데 공예 또는 미술과 관련하여 우리가 사용하는 용어의 대부분은 옛날부터 사용하던 한자어이거나 한자어에 기반한 일본식의 표기를 따른 것이다. 한 예로 공예의 장인정신과 직결되는, 흔히 쓰는 ‘작업作業’이란 언어를 살펴보자.

‘작업’이란 우리말로 풀어쓰면 무언가를 ‘만드는 일’쯤 되지만, 이 말이 함축하는 뉘앙스의 범위는 한층 깊고 넓다. ‘업業’이란 어찌 보면 우리의 생활 자체를 의미한다. ‘업’이라 하면 ‘일’이란 언어가 먼저 떠오르는데 이것은 우리의 몸과 사고와 직결되는‘노동’을 뜻한다. 몸과 사고의 노동은 곧 우리의 ‘직업’과 ‘생계’로 이어진다. ‘업’을 실행한다는 것은 그것이 곧 우리의 생활일진대, 그것은 필연적으로 종교와 윤리 같은 ‘근원, 기초, 시작’과 연루된 사회적 함축성을 띨 수밖에 없다. 때문에 ‘업보業報’ 혹은 ‘인과응보’의 뜻을 품고 있으니, 몸과 입과 뜻으로 짓는 선악의 소행이 곧 ‘업業’인 것이다.

김시영과 이상협은 공예가로서의 당당함이 ‘작업’이라는 단순한 용어 속에 함축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업보’처럼 다가온, 선택한 공예가로서의 고뇌와 환희의 생생함이 곧 작업이다. 이러한 작업의 속성이 생산해 낸 결과물은 또 다른 차원의 문제이나, 사회의 현실은 과정보다는 결과를 앞세워 유통과 가치의 상품성에 치중하는 자본주의적 모순을 안고 있다. 작품이라 일컬어지는 결과물이 가질 법한 진정성의 농도와 미학적인 평가는 작가를 떠나 관람자가 개입하는 또 다른 범주의 문제인 것이다.

김시영의 ‘흑자’

근자에 이르러 단색화의 재유행과 함께 단색화류의 추상을 공예도 추구한다. 달항아리가 한국의 미감을 대표하는 미적 오브제로 부각되면서, 전통과 맞물린 추상성의 재현을 공예로 따라 하는 경향이 생겼다. 그 경향과 함께 공예는 태생적인 기능과 멀어지면서 흔히 우리가 미술의 주류라 일컫는 회화와 조각의 개념과 미학, 장식성을 덩달아 추구하기 시작하면서 ‘작가’라는 호칭으로 이들 두 장인을 편하게 부른다. 단색화의 재유행이 불러온 이조백자의 미감도 어찌 보면 유교적 도덕성의 시지각에 갇힌 우리 전통의 연장선상에 있다. 전통의 재현은 복제를 넘어 그 시대정신이 깃든 재현이되 변형된 무엇이어야 한다. 공예의 순기능과 아름다움의 척도는 바로 이 변형된 무엇에 깃든 것이다. (중략)


이상협의 ‘은기’

이상협은 “flow, 흐름, 흘러내림, 얼어붙음, 녹아내림 등 자연의 유기적인 현상에서 영감을 얻었다”고 한다. 이 영감의 발현은 조형적으로, 또는 형식적으로 ‘달항아리’ 은기의 표면에 나타나는 질감의 재현적 표현과 매우 닮아 있다. 물론 무수한 노동의 망치질 가운데 몸과 정신이 일치하는 무아의 몰입감도 있었을 테지만, 어쨌든 그 질감은 타격의 힘(에너지)을 조절하는 가운데 우연히 생성되는, 때로는 의식적으로 생성한 추상적인 질감에 불과하다. 그런데 이런 추상적인 질감의 부분과 전체의 표피가 관람자에게 매혹적으로 다가와 그 자체만으로도 만져보고 싶은 촉각적인 충동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거기에 덧붙여 기억에 의한 우리의 시지각은 무언가를 연상해 마치 무언가 ‘흐르는’ 듯한 정서와 맞닥뜨려 시공간을 초월한 각자 나름의 재현적인 일상으로 우리의 상상을 이끌어간다.



-------------이하 생략

<본 사이트에는 일부 내용이 생략되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월간도예 2024년 6월호를 참조 바랍니다. 정기구독하시면 과월호 PDF를 다운로드하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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