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소담화③ | CRITIC IN CONVERSATION]
미술공예운동과 민예운동 다시보기
글. 홍지수 미술학, 미술평론
공예 전시들을 보러 다니다 보면, 전시장 벽면이나 기획자들의 글에서 가장 많이 눈에 띄는 이름이 있다. 윌리엄 모리스William Morris1834~1896다. 그는 영국의 화가, 디자이너, 최초의 디자인 회사인 모리스 마셜 포크너사Morris, Marshall, Faulkner & Co.(1874년 모리스회사로 개편)를 경영한 자본가, 공예 운동가였다.1 그가 바우하우스, 공예운동의 부흥에 끼친 후대의 평가와 영향이 지대한 것에 비해, 그의 공예관과 활동이 산업혁명 초기, 자본과 기계로부터 인간의 감각을 되찾기 위한 대안기술 공동체이자 사회주의에 입각한 사회개혁운동의 일환이었다는 점은 크게 부각되지 않는 것 같다. 모리스는 공예가 사회 변혁의 도구로 기능하길 원했겠으나, 실상 모리스의 지식과 활동은 오히려 대중보다 공예인들에게 더 큰 영향을 미치고 지지를 받고 있는 듯하다. 일반화할 수는 없지만, 내가 한국 공예현장에서 보았던 모리스관련 인용 시도들은 기술 과잉의 시대 속에서 더욱 증폭되는 개인의 미래에 대한 불안감, 자본주의 사회 속에서 수공이 처한 위기와 장인들의 존재를 정당화하고 필요를 주장하고자 할 때 유독 많이 보였다. 여기저기 보일수록, 정작 모리스의 말은 저자의 의도와 문맥을 이탈해 과도하고 무분별하게 동원, 소모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1940년대 등장한 민예운동가들의 민예미론 역시 모리스의 미술공예운동과 함께 한국 공예계에서 수공예의 위기와 존속, 우수성을 주장하는데 자주 동원되는 담론이다. 야나기 무네요시를 비롯한 민예운동가들은 1차 세계 대전으로 고조된 근대 위기론에 따라 서구 중심의 엘리트 예술과 인위적인 근대성을 비판하고자 조선의 무명 잡기를 민예미의 본류이자 새로운 미의 원초, 극치로 내세웠다. 야나기의 민예미론은 한국 최초의 미학자인 고유섭에 영향을 미쳤고, 오랫동안 한국 미술의 미적 특질이자 한국공예의 특색을 설명하는 담론으로 활용되었다.
모리스와 민예운동가들의 공통점은 공예를 엘리트 예술의 아취와 격조에서 나온 예술이자 자율적 즐거움에서 비롯한 인간의 창의적 노동, 사회 변화를 위한 수행적 탐색으로 본다는 점이다. 이는 인간의 올바른 덕성으로 만든 예술이 이상 국가 건설에 도움이 된다는 플라톤의 도덕론과 마르크스의 자본론을 관통하는 주장으로 예술(공예)의 순수성보다는 사회적 책임성을 강조한다. 이들은 당대 서구 문명의 위기론과 비판론에 대한 대안으로 수공예를 ‘문화적 비전’ 내지 ‘이상 국가’ 건설 기제로 언술하고, 예술을 자신들의 이상화된 세계를 구현할 탈역사적으로 심미화된 대상으로 규정한다. 따라서 이들에게 공예는 기계와 자본에 저항하기 위한 반권위적 태도, 자신들의 사회적 실천과 문화적 비전을 현실에 구현하기 위한 건설 기제 성격이 짙다.
<본 사이트에는 일부 내용이 생략되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월간도예 2022년 3월호를 참조바랍니다. 정기구독하시면 지난호 보기에서 PDF를 다운로드 하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