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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08월호 | 특집 ]

특집3) 제주에서 사라져가는 도기를 복원한다는 것
  • 편집부
  • 등록 2020-06-01 16:08:34
  • 수정 2020-06-05 16:0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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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ecial Feature III

제주에서 사라져가는 도기를 복원한다는 것
글·사진_강창언 도예가, 제주도예촌 관장

 

제주산 도기는 없었다
언제부터인가 옹기 甕器 란 용어의 명칭이 도기 陶器 를 대신하는 통칭 統稱 이 되어 버렸다. 옹기는 항아리 형태의 명칭으로만 적합하다. 예를 들어 옹기병처럼 형태와 형태의 복합은 알맞지 않고, 도기병처럼 재질과 형태로 구성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또한, 여기에서 말할 도기는 성형 후 그대로 굽거나 유약을 칠해서 가마에서 한 번에 구워낸 기물을 말한다.
화산섬 제주는 현무암을 기반으로 두고 있다. 지하 속 에서 용해가 된 용암들이 화산이 터지면서 땅위에 흐 르거나 뿌려졌다. 구멍이 숭숭하고 까만색조의 돌들은 내화재로 적합하여 그런지 제주도의 가마는 모두 돌이다. 한라산을 중심으로 360 여개의 오름이 있다는데 서부끝자락 지역에는 한 손에 꼽힐 만큼 오름의 수가 적다. 그만큼 평탄한 지대가 많고 제주도에서는 귀하다는 논 沓이 많아 마치 남도의 농촌 같기도 했었다. 옛 도공들이 점토를 파내고 나면 그 곳에 물이 고여 논이 된 것이다. 제주섬에는 약 50 채의 석요 石窯 있었고 그 가운데 대략 40 채가 서부지역에 있었다. 그 만큼 질 좋은 점토를 얻을 수 있었을 것이다.

대정읍과 안덕면, 한경면 등지에서 120 여종의 대량의 도기들이 생산되었는데 그 가운데서 신평리, 구억리 와 그 인근 마을에서는 남녀노소할 것 없이 도기 생산에 관련되어 있었다. 점토를 파거나 섬피 땔감으로 쓰이는 생나 무가지 혹은 가시덤불 등를 하거나, 그릇을 만들거나, 굽거나, 가마를 짓거나, 판매하는 것까지 각 분야별로 체계를 이루고 있었다. 심지어 시루, 향로 등을 만들던 ‘검은 그 릇’과 배수로에 쓰이는 토관, 약을 달릴 때 쓰던 풍로까지 다양했었다. 도기 생산은 대량화 보급화로 자연적으로 분야별 전문가들이 있었고 그 시장은 매우 활기 찬 나날들이었다. 어려웠지만 사람들은 생기가 났고 어느 지역에 가도 도기로 인한 큰 자금들이 오가기 때 문에 대접을 받을 수 있었다.

그러던 것이 1945 년 기점으로 일제강점기가 끝나자 남과 북이 정치적 대립으로 나라가 혼란해졌다. 급기야 1948 년 제주에서는 4 월 3 일 비극적인 사건이 일어 나면서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는데, 그 시기에 회색 조의 그릇인 ‘검은 그릇’이 더 이상 만들어지지 않았다. 중산간 지대의 모든 사람들에게 피난령이 내려졌다. 도공들도 모두 해안 마을로 대피해야 했는데 ‘검은 그 릇’ 도공들은 다시 중산간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검은 그릇’은 가마 안에서 구울 때 연기를 먹여서 검게 만든다. 자기 瓷器 를 환원소성 還元燒成 하는 것과는 차이가 있고 ‘불연소성 不燃燒成 ’이라고 말하고 싶다.


제주섬에서 석요의 기원은 알 수 없으나, 함덕리에서 탐라국시대 1105 년에 고려의 군으로 개편에 짓고 도기를 구웠을 것으로 추정되는 ‘검은그릇’가마를 발견하여 알린적 이 있다. 그 가마는 천장이 둥그스름한 무지개형이 아 닌 맞배지붕처럼 삼각형으로 되어 있다. 가마의 벽 역할을 할 수 있는 자연 암벽에 경사진 홈을 내고 넓적한 판석을 꼽아서 비스듬한 삼각 천장을 만들었다. 그 어디에서도 삼각천장 가마가 보고된 것을 본 적이 없다. 다시 말해 우리가 잘 아는 아치형 무지개형 천장을 만들 줄 모른 도공들의 흔적이다. 이 후 제주섬의 모든 가마들 은 석요 石窯;돌가마 로 만들어졌다.

1271 년 고려의 삼별초 군사들이 무력으로 침략한 몽고 군사들에게 항쟁을 하며 제주에 들어왔었다. 3 년 뒤, 제주를 공격한 고려와 몽고의 연합군에게 패하고 삼별초 군사 등은 모두 순국했다. 그 당시 입도했던 삼별초 군사들은 건축, 토목, 항해술 등이 뛰어났는데 그들이 사용했던 가마터 2 곳을 확인한 일이 있다. 그 중에 1 기는 항파두성 밖에 지금도 매립되고 방치되어 있는데 무지개형 천장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앞서 밝힌 삼각천장은 그 이전 시기의 것이라는 셈이다. 1700 년대에는 ‘노랑그릇’이라는 강도가 높은 도기가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가마터 유적에서 살펴보면, 18 세기 백자기와 동반된 경우가 흔하고, 16 세기 부장품 에서 ‘노랑그릇’이 출토되지 않고 있는 점 등을 고려해서 추정한 시기이다. 처음에는 ‘톳물 灰釉 ’이라는 유약 을 칠한 도기와 유약을 칠하지 않고 굽는 ‘자연유’도기가 같이 생산되었다. 가마도 앞뒤로 뻥 뚫려있는 ‘검은 굴’에 비하면, 연료가 타는 ‘부장’과 기물실인 ‘굴안’으로 구분되어 있다. 옆으로 ‘굴도’라는 출입구도 뒀다. 고온의 절정기에는 천장 양옆으로 화력을 더하기 위한 ‘독 새기고망’이라는 손바닥만 구멍도 약 50cm 내외로 설치되어 있다. ‘검은굴’에 비해 복잡해졌지만 효율적이다. 그런데 뒤쪽에 굴뚝이 없는가 하면, 화도 앞에는 ‘부장쟁이’란 둥그스름한 집이 있다. 이 또한 희귀한 예로 비바람이 많은 제주섬의 기후 특성상 만들어진 것이다.

1800 년경부터는 고온의 갈색도기인 ‘노랑그릇’들이주류를 이뤘고, 가마도 점점 커진다. 또한 어느 정도 정해진 도기들이 크기와 종류 그리고 일의 분업 등으 로 체계화되었다. 그렇게 도기들은 대량으로 생산, 보급되며 아낙들의 애호하고 선호함과 동시에 도공들과 지역들의 평가도 매겨지며 요장의 성공 여부도 판가름 되었다. 그러나 1960 년대 들면서 갑자기 나타난 가볍고 깨지지 않는 플라스틱과 고무통은 순식간에 그릇 시장을 점령해 버렸다. 양은이고 양철 그릇도 없어 지는데 제주도기도 신소재에 당해낼 재간이 없었다. 1968 년 구억리 ‘동쿨 東石窯 ’과 고산리 일곱드 르굴 七田里 石窯 ;실제, 신도리 소재 이  평상시처럼 소성되었는데 그 후 가마 가 운영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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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사이트에는 일부 내용이 생략되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월간도예 2019년 8월호를 참조바랍니다. 정기구독하시면 지난호보기에서 PDF를 다운로드 하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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