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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9.06월호 | 특집 ]

전시공간 연출
  • 편집부
  • 등록 2009-07-11 12:29:48
  • 수정 2010-03-17 16:0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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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미술관 전시의 공간연출이 의미하는것
  • 김우임

미술관 전시의 공간연출이 의미하는 것  
| 김우임 서울시립미술관 큐레이터

작품이 놓이는 공간 구성과 연출은 전시의 성패를 좌우하는 결정적 요소이다. 전시할 대상 즉 작품을 선정하고 선정된 작품을 어떻게 구성하느냐의 문제는 곧 무엇을 보여주느냐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사실 미술관 전시에서의 대상은 개별 작품들의 집합이다. 하지만 어찌 보면 작품이란 언제나 자의적으로 연출된 공간에서 이루어지는 상설전시 또는 기획전시에서 하나의 요소일 뿐이다. 매리 앤 스타니제프스키가 말했듯 전시 디자인의 중요성을 살펴보는 것은 미술사에 생동감을 부여하고 역사와 문화 전 영역의 시공간적 특성을 인식한 접근이 가능하게 해 준다.1) 작품 뿐 아니라 전시 역시 사회적 논제, 정치적 쟁점, 기획자의 시각, 이데올로기 등의 프리즘을 통해 재현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전시도 일종의 재현이며 그것은 전시된 작품과 그것을 연출하는 방법, 공간을 구성하는 방식에 따라 재현된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우리의 현실은 어떤가? 웬만한 국공립 미술관에서도 전시 디자이너를 따로 두는 경우는 드문 것이 우리의 실정이다. 그렇기에 큐레이터에게 공간 연출력도 갖추어야 할 중요한 덕목이 되었다.
제도와 전시 그리고 공간
전시는 일종의 제도이다. 미술관이라는 전시 공간을 둘러싸고 작품, 작가, 큐레이터 등이 등장하여 벌이는 일종의 게임이 다시 미술관 공간을 통해 제도화되어 사회 속 산물로 드러나는 순간이자 사건인 것이다. 이 같은 ‘제도’로서의 전시는 그것이 놓이는 공간의 성격과 구조, 디자인에 따라 전혀 다른 모습으로 변모하며, 그 배후에 놓인 고도의 전략과 전술, 사회적 초상을 의미화 하는 행위이기도 하다. 모더니즘 미술에서는 작품의 절대적 가치를 강화하기 위해 작품의 맥락을 제거하고자 하였고, 그로인해 작품에 몰입하는 절대적 공간으로 미술관 전시공간을 상정하였다. 모더니즘 미술을 수용하던 미술관에서는 흰 벽에 최대한 심플한 액자를 한 그리드 형태의 작품을 멀찍이 띄엄띄엄 배치해, 관람자로 하여금 최대한 작품 하나하나에 몰입할 수 있도록 하는 식이었다. 이는 관람자를 자율적 주체로 부각함으로써 개인의 자율성을 존중하는 것을 최대의 사회가치로 내건 근대 시민사회(자유민주주의)로의 이행을 시각화한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이런 공간들은 개인의 자율 감각과 인성의 본질을 증진시키고자 구성된 것으로 볼 수 있다.2) 이 같은 연출 방식은 지금도 여전히 유효한 것으로 특히 추상회화처럼 몰입을 요구하는 작품에서 더욱 그렇다. 하지만 모더니즘 미술에서 작품이 놓인 사회적, 공간적 흔적을 지워 작품의 자율성을 강조하려는 연출방식이 오히려 상품화되어 소비되며, 사회문화적 흔적을 되살리는 전시의 역사는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3) 예술작품의 신화화를 강조하기 위한 전략으로, 작품의 맥락을 지우고자하는 모더니즘 미술관의 의도는 예술의 자율성을 부르짖었던 모더니스트들의 의지와는 반대로, 세속화 일변도의 길을 걷게 된다. 예술작품의 자율성과 절대적인 독창성을 최우선의 가치로 삼고 현실과 분리시키려 했지만, 결국 모든 예술은 역시 사회의 맥락과 맞닿아있다는 사실이 점차 폭로되며, 전시 공간 연출의 중요성은 재삼 강조되고 있다. 그리고 그 중심에 제도적 장치로서의 미술관이 있다.
결국 작품이 놓이는 공간에 따라, 그 작품이 지닌 의미와 의도가 삭제되기도 하고 되살아나기도 한다. 어떤 공간에 어떻게 놓이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이야기가 펼쳐지는 것이다. 또한, 그것을 만든 제작자, 보여주는 이와 보는 이의 관계에 따라 새로운 기능과 문맥을 가지게 된다. 여기서 관람자들에게 보여지는 전시 행위는 그것을 기획한 이의 사상과 의도를 암묵적으로 강요하고 있다. 아무리 객관적이고 중성적으로 보이는 전시 공간이라 할지라도, 전시는 그것을 어떤 식으로 해석하라는 무언의 의도를 함의하고 있다.

관람객과 전시공간 ‘Viewer에서 Reader로’
이같은 전시에서 관람객은 모호한 대중일 뿐인가, 아니면 적극적인 해석자일까? 포스트모더니즘 시대로 접어들며, 전시는 관람자에게 단지 보는 것을 넘어, 작품을 읽어내기를 요구한다. 미술관의 방문자처럼 단편적으로 그림을 감상한 것과 달리 암호를 해독하듯 작품 속의 단서를 따라 읽어야 하는 것이다. 바르트의 말대로 그야말로 독자의 시대가 온 것이다. 이는 전시 내용이나 작품 뿐 아니라 그 구성에 있어서도 적용된다. 관람자들은 작품과 작품 사이 그것이 놓인 공간의 행간을 읽어내려고 노력하고 텍스트로서의 작품과 전시는 독자인 관람자들에 의해 구성된다. 이 혼돈의 과정 속에서 오히려 소통이 가능할 수 있을 것이다. 즉, 미술작품의 의미는 해석자의 몫으로 남게 되는 것이다.
동시대미술에서 시각이외의 청각, 촉각 등 다양한 감각을 기반으로 한 작품들이 등장하며 오감의 체험이 중시된다. 이같이 신체적 반응을 이끌어내는 전시의 경우에는 관람객과 작품, 공간의 상호작용이 더욱 결정적인 요소가 된다. 신체적이고 감각적 반응을 이끌어내기 위해 전시작품의 높이와 이를 둘러싼 벽면의 색채 심지어 그래픽 요소들이 적극 활용된다. 반대로, 작품 자체에의 극단적인 몰입을 위한 장치로 흰 벽면과 높은 천장, 넓은 공간에 집중하는 경우도 여전히 존재한다.

후기자본주의사회의 미술관
같은 전시라도 어느 공간에서 전시하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맥락과 경험을 제공하게 된다. 최근 들어, 투어형식의 순회전이 성행하고 있는바 이같은 현상은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다. 공간의 성격과 구조에 따라 같은 작품도 전혀 다른 맥락에서 읽힐 수 있을 뿐 아니라, 공간을 어떻게 구성하느냐에 따라서도 전혀 다른 감각을 느끼게 하기 때문이다. 이같은 추세에 맞추어 아시아를 순회전 마켓의 주 타깃으로 설정한 서구의 대형 미술관들이 있기 때문에 더욱 가속화 되고 있는 실정이다. 이같은 상황 속에서 스펙터클 화된 극장 혹은 백화점으로서의 미술관은 갖가지 욕망이 충돌하며 얽혀있는 장이기도 하다.
후기자본주의사회에서 미술관은 고립된 시각 경험이 아닌 다채로운 시각적 경험을 하도록 유도한다. 관람자와의 소통과 체험을 중시하는 동시대미술세계를 수용하는 공간으로서 미술관은 어떤가? 관람자와의 소통을 내세우지만 결국 후기 자본주의 사회의 물신적 욕망을 감각적인 이미지와 스펙터클한 경험을 제공하는 장소로 변모하였다.
미술관이 점차 패션, 디자인, 상품적 가치와 결합하고 있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이는 어느 지역에 국한되지 않고 마케팅과 결합해 전 세계적으로 불고 있는 열풍임에 틀림없다. 패션쇼를 펼쳐 이목을 끌기도 하고, 아예 명품 브랜드와 결합, 작품 제작에서 전시 홍보 마케팅까지 결속하는 모습도 보인다. 분명한 것은 후기 자본주의 사회에서 미술관은 대놓고 세속적인 자본과 결합하는 곳이다. 파티를 통해 마케팅을 강화하고 관람객을 유치하는 전략은 오늘날, 전 세계 미술관에서 나타나고 있는 현실이다. 이 같은 현실은 공간구성에 있어서도 큰 영향을 끼치게 된다. 따라서 가변적인 구조로 이동이 가능하며 유연한 전시 공간연출이 주목을 받고 있다. 일종의 쇼룸을 연출하기 적합한 스펙터클한 공간이 주목을 받고 있으며 심지어 아예 가변적인 공간이 등장하기도 한다.
서울시립미술관 경희궁 분관에서 개최되고 있는 프라다-트랜스포머도 이와 같은 현상으로 보인다. 공간 자체가 가변적으로 변화하며 그에 따른 전시물의 배치도 가변적이다. 고도로 연출된 쇼처럼 전시공간은 기능하고 있다. 한편 샤넬과 세계적 건축가 자하 하디드가 합작한 모바일 아트Mobile Art는 전 세계적인 센세이션을 불러일으키며 투어를 한다.
어찌됐건 미술관 전시의 공간연출은 관람자와 작가의 욕망을 채우는 기재의 촉매제로 작동하는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이같은 욕망의 교차 속에서 전시 공간 연출을 함에 있어 스펙터클의 쇼를 연출하는 것 보다는 전시를 통해 현대미술과의 심도 있는 내밀한 소통을 가능하게 하고 생각하도록 독려하는 단서로 기능하기를 바라는 기대는 떨칠 수 없는 희망이다. 관람객에게 생각하도록 요구하는 전시와 공간연출은 아직도 존재하기 때문이다.

결국, 동시대 미술의 전시는 두 방향의 양 극단으로 치닫고 있는 것 같다. 하나는 스펙터클한 쇼처럼 고도로 연출된 소비사회의 산물로써 상업화 일로로 치닫는 경우이며 또 다른 하나는 비엔날레에서 볼 수 있듯 복잡한 개념 일변도로 설명을 듣기 전에는 알 수가 없는 개념적 경향이다. 하지만 앞서 언급했듯 이 두 경향도 동전의 양면처럼 서로 뗄 수 없는 관계일 뿐이다. 공간연출을 통해 문맥을 되살리거나 삭제하는 일은 관람객에게 문화 혹은 사회적 배경을 읽고 자신만의 색다른 프레임으로 그것을 새롭게 바라보게 자극한다. 이 같은 자극은 전시의 공간연출에 있어서 가장 큰 매력이고 그만큼 쉽지 않은 일이다. 고정된 것처럼 보이는 텍스트와 이미지를 분리하고 이들이 보다 넓은 문맥 속에서 새롭게 재조합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는 것이 전시 공간의 연출에 있어서 가장 근본적인 문제일 것이다. 현대미술을 고정되지 않은 시각으로 다양한 해석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야말로 동시대 전시기획자들의 고민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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