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Main Plants」 25×32cm | 치자열매, 자기질 슬립 | 2021
도예를 시작했을 때 가장 인상 깊었던 순간은 뜨거운 가마에서 완성된 도자기를 꺼내는 경험이었다. 말랑한 점토가 단단한 도자기로 변하는 모습은 잊을 수 없는 한 장면이었다. 뜨거운 불을 견디고 남은 도자기는 나에게 늘 무한한 호기심을 불러일으켰다. “이것을 가마 속에 넣으면 과연 어떻게 변할까?”, “저것은 과연 살아서 나올 수 있을까?” 어린아이 같은 질문과 함께 여러 재료와 사물을 구워보았다. 그 과정에서 어떤 것은 타서 사라졌고, 어떤 것은 남았다. 이후 나는 ‘타고 남는 것’을 찾기 위해 다양한 것을 태우고 구웠다. 광물, 유약, 작은 돌, 꽃과 식물 등 자연의 재료가 <타고 남은 것> 연작의 주요한 소재이자 바탕이 되었다.
결국, 타는 것과 남는 것 모두 매체가 된다. 타는 것은 유기물이고, 남는 것은 무기물이다. 유기물은 타서 사라지지만, 무기물은 어떤 형태로든 남는다. 이런 물리적 특성을 바탕으로, 나는 돌, 식물 열매, 그리고 인공 내화물인 캐스터블을 작품의 주된 매체로 삼아, 없어지지 않고 남아 있는 것들을 탐구했다.
다양한 자연석 위에 흙물을 바르거나 유약을 입혀 굽고, 천일홍, 꽈리, 치자 열매 같은 꽃과 식물을 흙물에 담가 번조하였다.
이 시기에는 재료와 물성에 집중했다. 가마에서 작품을 꺼내 보면 예상하지 못한 변형과 유기 재료가 타고 남은 흔적, 그리고 새로 생긴 공간이 소멸과 생성이라는 새로운 철학적 단초가 되었다. 그렇게 나는 ‘타고 남은 것’ 모두에 주목하게 되었다. 이후 작업에서는 보다 선명한 주제와 소재를 고민하며, 주된 소재로 생화를 선택했다. 꽃은 다양한 문화적 의미를 담고 있어, 물성뿐 아니라 또 다른 이야기를 전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세밀한 꽃을 도자기로 구현하기 위해서는 재료 연구가 필수였다. 여린 꽃잎 위에 흙물을 입히려면 질료 탐구가 우선되어야 했다. 섬세하면서도 부드러운 형태와 질감을 구현하기 위해 실험을 통해 이전에 없던 전혀 새로운 물질을 개발하였다.
흙도, 유약도 아닌 중간 지대의 물질에 생화를 푹 담가 고온에서 굽는다. 마치 탕후루처럼, 튀김처럼 옷을 입고 가마에 놓인 꽃들은 번조 과정 중에 타서 사라지고 얇은 외피만이 꽃의 형체를 간직한 채 새롭게 태어난다. 이 과정을 반복하며 ‘굽는 것’이란 무엇인가, ‘태우는 것’과는 어떤 차이가 있는가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되었다.
「Synthesis cb-1」 15×15×5.5cm | 자연석, 캐스터블, 유약 | 2022
‘태우는 것’과 ‘굽는 것’은 같은 불의 힘으로 이루어지지만, 결과는 다르다. ‘태운다’는 소멸을 의미하고, ‘굽는다’는 생성의 시작을 암시한다. 하지만 그 경계는 항상 모호하며 차이는 미묘하다. 태우는 것은 소멸의 제스처다. 불꽃 속에 던져진 물질은 점차 형태를 잃고 연기와 재로 흩어진다. 반면 굽는 것은 생성의 미세한 숨결이다. 고기나 빵을 굽는 행위처럼, 물질이 변형되고 잠재된 가능성을 끌어내는 과정이다.
그러나 이 둘은 완전히 다른 세계가 아니다. 태우는 것과 굽는 것은 맞닿아 있다. 불 속에서 어떤 것은 타고, 어떤 것은 구워진다. 이는 시간과 열의 차이일 뿐, 본질은 변화의 법칙에 따른다. 결국 불꽃 속 생성과 소멸은 서로 맞물린 원리다. 소멸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생성을 위한 무대가 된다. 불 속에서 태우고 굽는 것은 결국 같은 맥락에서 존재하며, 물질의 변화를 통해 순간의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타는 것은 끝이 아니고, 굽는 것도 영원하지 않다. 모두 순환하며, 존재는 영원히 변하고, 새로운 형태로 다시 태어난다.
이 사유는 존재에 대한 물음으로 이어졌다. 존재란 무엇인가? 어떤 의미로 해석될 수 있는가? 내 작업의 키워드는 물질, 현상, 존재, 의미로 귀결되었다. 이를 구체화하기 위해 여러 방면을 탐색했고, 그중 하나가 물질현상학이었다. 물질현상학은 물질 자체가 드러나는 방식, 그 현상성에 주목 하는 철학적 시도다. 물질이 단순히 지각의 대상이 아니라, 스스로 생동하고 변형되며 존재론적 의미를 드러내는 방식을 탐구한다. 이러한 사유는 도예라는 매체의 속성과도 긴밀히 연결된다. 흙과 불, 시간이라는 조건 속에서 도예는 물질이 스스로를 드러내고 변형되는 과정을 감각적으로 체험하게 하며, 물질현상학적 사유를 시각적으로 구현할 수 있는 장을 제공한다.
「타고 남은 것: 불완전한 심연」 20×32cm | 자기질 슬립, 유약, 백금 | 2024
사진. 작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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