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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2월호 | 칼럼/학술 ]

[에세이 ESSAY2] 그릇이 된 생각들_옹관甕棺: 나주임씨순옥지가羅州林氏順玉之家
  • 이현배 옹기장이
  • 등록 2025-03-05 18:20:03
  • 수정 2025-03-05 18:20: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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옹관 나주임씨순옥지가 

주옹-가로68×세로84.5cm, 부옹-가로53×세로75cm (사진-영암도기박물관)


수의는 안동포가 좋다고 한다. 그 안동을 두 번 가봤다. 처음 갈 때는 그리 먼 곳인 줄 몰랐 다. 밤늦게 돌아왔는데 다음날 또 가야 했다. 토련기를 중고로 사 왔는데 갖고 와서 보니 힘 이 달렸다. 마침 가져왔던 인근 공방에서 쓰겠다고 하여 다시 갔다. 

다음날 안동에 다시 갔을 때 애써 멀리 왔으니 ‘가 볼 만한 곳’을 가보고 싶었다. ‘어디로 갈까’ 하다가 옹기장이니까 질그릇 도陶, 도산서원에 가게 되었다. 입장을 하면서부터 퇴장(관람 시간제한)에 쫓겼는데 후다닥 본 것 중에 “퇴계와 고봉의 격물치지 논쟁” 텍스트가 있었다. 퇴계선생과 고봉선생의 오랜 펜팔이 흥미로웠다.

그다음 해였다. 나주에 가서 옹관을 굽고 돌아오는 길에 고봉선생의 월봉서원에 갔다. 서원 의 유사께서 보기에 나의 행색이 남달랐는지 무슨 일을 하는 사람이냐고 묻길래 옹기일을 하는 사람이라고 했더니 월봉서원터가 본래 사기점터였다고 알려주었다. 묘했다. 퇴계선생의 도산서원은 질그릇가마터, 고봉선생의 월봉서원은 사기가마터라는 것이 묘했다. 그러니까 그릇을 굽던 자리가 또 공자왈 맹자왈 하기도 좋은 자리였던가 보다. 그렇게 조선사회는 점일을 깔고 앉은 사회였던 것이다. 

그렇게 안동에 가본 지 오래 되었는데 그 뒤에 안동역이라는 노래를 많이 들었다. 그때 안동 역을 보지 못했고 또 안동에 기차역이 있을까 싶었다. 그러고 보면 안동에 역이 있어서 안동 역이 아니라 ‘안 오는 건지’ ‘못 오는 건지’ 해싸서 안동역이지 싶은, ‘안 왔냐’ ‘못 왔냐’ 했으면 안동역이 아닐까 하는, 안동역은 그곳이 아니라, 그것이지 싶은 것이다.

아버지를 보내드리고 사십 구일째 되는 날, 어머니를 보내 드리게 되었다. 어머니께서 육체의 옷을 벗으려 하실 때 섬진강을 발원하는 팔공산 데미샘에 있었다. 그 어떤 일의 근본을 찾아야 할 때면 찾는 곳인데 이게 뭔가 싶었다. 옹관일을 붙든 것도 그랬다. 1995년, 첫 개인전 《손내사람 손내옹기전》을 전주에서 하게 되었다. 고향 가까이에서, 옹기로 전시를 한다는 조심스러움이 있었다. 그래 옹기일에 대한 개념을 먼저 말해야 했다. 

“옹기는 밥을 담아 온 오목아리서부터 똥을 담아 온 합수 독아지까지 한반도 사람들이 밥 먹고 똥 싸는 ‘산다는 것’ 과 세상에 태어날 때 태항아리, 죽어서는 옹관까지 한반도 사람들의 나고 죽는, 그야말로 처음과 마지막까지 모든 것을 담아왔습니다.” 

그렇게 말해 놨으니 옹관작업을 해야 했다. 그 작업이 지지부진했는데 이후 국립나주문화재연구소와 협업 (2008~2017)을 하게 되었다. 옹관문화가 크게는 환태평양 지역의 공통된 문화이면서 영산강유역의 마한문화는 전용옹관이라는 독창성이 있어 연구소에서 의지를 세웠 던 것이다. 협업을 시작하면서 쓴 말은 “다시/ 또/ 다시”였다. 그렇게 실험고고학으로 작업을 마치고, 행동고고학으로 ‘부모천년수 자손만세영父母千年壽 子孫萬歲榮’ 작업을 하고서 부음을 맞이했던 것이다.


실험고고학-옹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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